유물유적

유교유적과 유물정려(旌閭)

분류 : 유교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정려(旌閭) 1) 효자김치조려(孝子金致祚閭: 侍墓집) 소재지 : 광양읍 덕례리 예구마을이 정려는 김치조(金致祚)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5년(고 종 2) 조정의 명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김치조는 본관은 김해이며, 안경(安敬)의 11세손으로 구산리 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병상에

1. 효자김치조려(孝子金致祚閭: 侍墓집)

소재지 : 광양읍 덕례리 예구마을
이 정려는 김치조(金致祚)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65년(고 종 2) 조정의 명을 받아 건립한 것이다. 김치조는 본관은 김해이며, 안경(安敬)의 11세손으로 구산리 에서 태어났다. 3세 때 부친을 여의고 홀어머니의 엄한 교육을 받고 자랐는데, 어머니가 이질에 걸려 병상에 눕게 되었다. 백방 으로 약초를 구하여 드리고 하늘에 기도하여 냇가에서 잉어를 잡아다 드렸으며 정성껏 간호하여 낫게 하였다.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에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시묘(侍墓)살이를 하였으며 그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보호하여 주었고, 홍수로 냇가를 건너지 못할 때 묘를 향해 업드려 기도하니 호랑이가 업어서 건 내 주었다고 한다. 또 묘 앞의 소나무에 송충이가 많아 하늘에 기도하자 스스로 땅에 떨어져 죽었다고 한다. 이후 97세에 여막 (廬幕)에서 별세하니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내렸다. 현재 이곳 정려는 그 동안 여러 번 개조하였는데 출입문에『孝子通政大夫金海金致祚之閭』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2. 효자서형흠려(孝子徐馨欽閭)

소재지 : 옥룡면 용곡리 흥룡마을
용곡리 홍룡 마을에 위치한 이 효자비는 서형흠 (徐馨欽)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광양향교에서 추 천하여 1905년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니 문중에 서 건립한 것이다. 옥룡면 용곡리에서 태어난 서형흠은 성균관 제 주 의(誼)의 후손으로 본관은 이천이다. 어려서 부터 총명하였던 서형흠은 효성이 지극하여 부모 님을 섬김에 있어 지성을 다하였다고 한다. 아버 지가 병상에 눕자 약초를 구하여 드리고 정성껏 간호하였으나 병세가 악화 되어 돌아가시자 묘 앞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하던 중 그의 효성에 감동 한 호랑이가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이 비석은 양 기둥 사이에 비신을 끼워 넣은 특이한 형태를 취하고 있으 며, 비의 상부에는 팔작형 옥개를 얹어 놓았다. 비의 전면에는「孝子通仕郞 行童蒙敎官陞正三品通政大夫利川徐馨欽之閭」라 음각되어 있다. 비의 크 기는 총 높이 140㎝, 비신 높이 34㎝, 넓이 50㎝, 폭 10㎝이다.

 

3. 효자황하석비(孝子黃夏錫碑)

진상면 황죽리 죽림마을에 위치한 이 효자비는 황하석(黃夏 錫)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광양향교에서 추천하여 1851년(철 종 2)에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여 창원 황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진상면 비평리에서 청계당(聽溪堂)의 주인인 생원 면기(勉 基)의 아들로 태어난 황하석은 호가 운고(雲皐)이며 어려서부 터 성품이 정아하고 풍채가 준수하여 언행이 바르고 물욕이 없 으며 남을 돕는 것을 즐거이 하였고, 부모님을 기쁘게 하기 위 하여 항상 노력하였다.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애통해 하며 어육 을 금식했다. 아버지가 병을 얻어 위독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 하여 드리고 대신 병석에 눕기를 기원하며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혈(注血)하는 등 간호에 정성을 다했으나 끝내 돌아가시자 여러 차례 기절을 하였다고 전한다.

 

4. 효자양복수려(孝子梁福洙閭)

소재지 : 진상면 청암리 392 (목과마을)
진상면 청암리에 위치한 이 효자비는 양복수 (梁福洙)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광양향교에서 천거하여 1863년(癸亥年3月)에 조정에서 정 려를 명하여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진상면 청암리에서 종기(鐘琪)의 아들로 태어 난 그는 타고난 성품이 어질고 착하여 어른을 공경하고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6세 때에 아버님이 병을 얻어 위중하였을 때 단지 (斷指) 주혈(注血)을 하였으며 후일에는 할복(割腹)까지 하였다. 부모가 냇물고기를 즐기므로 겨울에는 얼음을 깨서 고기를 잡아다 드렸으며, 아버 지가 노환으로 돌아가시자 3년간 시묘(侍墓) 살이를 하였는데 그의 효성에 감동한 호랑이가 따라 다니며 보호해 주었다고 한다. 이 비각은 낮은 토단에 석축을 돌리고 원주형 초석에 두리 기둥을 세웠으 며 공포는 익공계 포작 형태에 겹처마를 하고 그 위에 팔작 지붕을 얹었다. 비 전면에는「有名朝鮮孝子贈嘉善大夫戶曹參判兼同知義禁府事五衛都總 府副摠管梁福洙之碑」라 음각되어 있다.

 

5. 효자안진묵비(孝子安鎭默碑)

소재지 : 진월면 차사리 차동마을
진월면 차사리에 위치한 이 효자비는 안진묵(安 鎭默)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93년(고종 30) 광 양향교의 천거로 조정에서 정려를 명하니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안진묵은 본관이 순흥으로 진월면 차사리에서 회 헌(晦軒) 선생의 후손으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 하고 품행이 단정하며 평소에도 온갖 약초를 구해 다가 약을 다려 부모님의 건강을 살피는 등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부친이 등창이 나서 사경을 헤매게 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고 발라 드리는 등 온갖 정성을 다하였으나 효 험이 없었다. 입으로 고름을 빨아주면 낫는다는 말을 듣고 환부를 날마다 빨아주고 약초를 구하여 발라주며 간호하니 완쾌하였다고 한다. 노환으로 돌아가신 후에는 묘 옆에 움막을 짓고 3년간 시묘했다. 이 효자비는 처음에는 비각 안에 세워져 있었으나 1979년 마을 저수지 공사로 인하여 수몰되자 저수지 위로 이건하였으나, 현재는 비각은 없고 비 만 세워져 있다. 비 주위에는 비각에 사용되었던 석재들이 놓여 있다. 비 전면에는「孝子贈童蒙敎官朝奉大夫安鎭默之閭」라고 음각되어 있고, 후면에는 장성 출신의 의병장이자 대학자인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이 쓴 그의 행적이 음각되어 있다. 비의 크기는 총 높이 193㎝, 비신 높이 140 ㎝, 넓이 56㎝, 폭 23㎝이다.

 

6. 쌍효려비(雙孝閭碑)

소재지 : 옥곡면 장동리 곡동마을
옥곡면 장동리 장동2구 회관 바로입구에 위치하는 데 이곳 쌍효려비는 효자∙효부에 대한 두 사람의 효 행을 기리는 비로서 고종 29년(1892년)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면서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받 은 전주 유씨 유계양(柳季養)과 숙부인(淑夫人)의 증직을 받은 해주오씨(海州吳氏)의 효행을 기리는 정려이다. 1929년 손자 오위장(五衛將) 유채규(柳采圭)가 정려를 건립하 였으며 그 이후 정각 및 주변을 보수∙정비하였다.

 

7. 효자 우달홍려(孝子禹達弘閭)

소재지 : 광양읍 인서리 151번지
이곳 정려는 1893년(광서 19년) 당시 예조(禮曹)에서 우달홍에 대한 행장을 입안하여 고종의 재가를 받아 1893년(고종 30년)에 정 려를 명하고 동몽교관 봉조대부 증직을 내렸다. 우달홍은 어버이 섬 김이 지극하여 변을 맛보아 부모의 병을 증험하고 위증하자 단지주혈 하였으며 부모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다 세상을 떠나 니 조정에서 정려를 지으라고 명하여 광양현에서 1897년에 정려를 건립하였다. 우씨 족보에 의하면 재목과 목수를 관에서 거행토록 하고 그들후손에게는 호적을 상등하고 온갖 부역이나 조세를 면세토록 하였다는 기 록이 전한다. 현재 정려와 함께 1898년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달홍의 효행을 기리는 세수재(世修齋)에는 예조입안, 우달홍교지, 정려기 등 현판 50여개 가 보존되어 있다.

 

8. 충신 김대례 공신각(忠臣金大禮功臣閣)

소재지 : 진월면 송금리 송현마을
김대례(金大禮)는 본관은 김해(金海), 자는 여대(汝大), 호는 성재(誠齋)이며 현감 중량(仲良)의 손이며 가선대부 한호(漢浩) 의 아들이다. 1573년(계유)에 출생, 1598년(무술) 정유재란시 당년 25세로 선조조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이끌고 큰 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시 섬진강 입구에서 왜 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어 선무원종 공신록에 등재되었다. 마을에 는 선무원종 공신 노위 훈련원 김해공지비가 1856(丙辰)년에 세 워졌는데 통훈대부 사헌부 감찰 순흥 안낙진(安洛鎭)이 찬(撰)하 고 그이 10세손 학조(學照)가 비(정려)를 건립하였다. 이곳에는 1862년(壬戌)에 쓴 공신각과 충효문 현판이 있다.

 

9. 충신 김천록 정려(忠臣金千祿旌閭)

소재지 : 골약동 금곡마을 입구
김천록(金千祿)은 본관이 울산(蔚山)이며 어려서부터 용력이 뛰어나고 담력이 출중하였는데 여주판관으로 있을 당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군량을 운송하는데 큰 공 을 세웠으며 제2차 진주성싸움에서 김천일∙최 경희 장군과 함께 끝까지 항전하다 장렬하게 순 절하였다. 조정에서 선무원종 공훈록(宣武原從 功勳錄)2등훈 반열에 기록하고 1891년 조정에 서 왕명으로 정려를 광양읍 용강리 국도변에 세 웠으며 그후 1982년에 정려비를 출생지인 골약 동 금곡마을 입구로 이전하고 같은 해에 광양읍 유당공원에 이건 사적비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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