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불교유적과 유물석비(石碑)

분류 : 불교유적과 유물

간략설명 : 석비(石碑) 1) 회은장로비(悔隱長老碑) ㉮ 소재지 :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 시기 : 조선 ㉰ 연혁 및 현황 이 비는 송천사지의 나한전지(羅漢殿址)라 전해지는 건물지 앞의 개울가에 있으며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 18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비좌(碑座)가 없었는데 최근에 장방형 의 비좌(가로 122㎝, 세로 59㎝, 높이 29㎝)

1. 회은장로비(悔隱長老碑)

㉮ 소재지 : 광양시 옥룡면 동곡리
㉯ 시기 : 조선
㉰ 연혁 및 현황 이 비는 송천사지의 나한전지(羅漢殿址)라 전해지는 건물지 앞의 개울가에 있으며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 182호로 지정∙보호되고 있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비좌(碑座)가 없었는데 최근에 장방형 의 비좌(가로 122㎝, 세로 59㎝, 높이 29㎝)를 만들어 지금은 각 부 재가 모두 있는 셈이며 전체높이는 274㎝이다. 비신(높이 183㎝, 너비 76㎝, 두께 18.8㎝)은 세장한 장방형으로 곳곳에 총탄의 흔적과 손상이 있다. 비신의 윗면에는「悔隱長老碑 銘」이라고 제명이 전시되어 있고 비문은 해서체이다. 이수(높이 66㎝, 너 비 105㎝, 두께 31.5㎝)는 장방형으로 윗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서로 얼굴 을 맞대고 여의주를 물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그 아래에는 용신의 비늘과 구름무늬가 가득 새겨져 있으며 따로 제액을 마련하지는 않았다. 뒷 면에는 용의 꼬리 부분과 함께 게∙거북이∙달팽이 등이 새겨져 있고 그 주위를 구름무늬로 채우고 있다. 비문은 조선조 후기 시문에 능했던 승려 백곡(白谷) 처능(處能)이 지은 것이다. 처능은 유명한 벽암대사(碧巖大師) 의 제자이며, 현종 15년(1674년)에는 남한산성 도총섭(南漢山城都摠攝) 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비문에는 회은의 출생, 출가후의 행장과 승장으로서 의 활약, 그리고 그의 법손들이 그를 기념하기 위해 비를 세우게 된 사실등 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음기에는 비 건립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 되어 있다. 회은(悔隱, 1587~1672)은 남원사람으로 법명은 응준(應俊)이라하며 속성은 기씨(奇氏)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옥섬(玉暹)에게서 구족계를 받고 뒤에 소요(逍遙), 호연(浩然), 벽암(碧巖)등 종장의 제자가 되었다. 1633 년에 입암성장(笠岩城將)이 되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의승 벽암을 따라 전공을 세워 다음해 양호도총섭(兩湖都摠攝)에 임명되었다. 1647년에는 팔방도총섭(八方都總攝)이 되어 남한산성에 머무르며 많은 공을 세웠다. 1651년 남옹성(南甕城)을 쌓은 공으로 가의(嘉義)로 승급되 었으며 1660년에는 자헌(慈憲)으로 승진되었으며 1672년에 86세로 입적 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문도인 처상(處祥), 광학(廣學), 등팽, 옥청(玉淸)등 이 처능을 찾아가 명문(銘文)을 부탁하여 1677년에 송천사에 이 비를 세 우게 된 것이다.

 

2. 도선국사비(道詵國師碑)

㉮ 소재지 :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 시기 : 고려
㉰ 연혁 및 현황 이 비문은 일찍이「東文選」에 기재되어 널리 알려져 있으며 그대로「朝 鮮金石總覽」上에 실렸다. 그러나 음기가 생략되어 비의 건립시말을 알 수 없었는데 다행히 康熙五十一年(서기 1712년) 옥룡사에서 판각된 비문의 전체 내용이 서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어 몇가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도선비의 건립을 위해서 그의 입적(898년)후 문인 홍적(洪寂)등의 봉표 (奉表)에 따라 學士朴仁範이 왕명을 받들어 비문을 만들었으나 비에 새기 지 못하고 말았다. 그 후 고려 의종 3년(1149년)에 이르러 최유청(崔惟淸) 에 의하여 두 번째로 비문이 찬술되었고 그 익년에 세워졌다. 이 해는 도선 입적후 실로 252년만이며 이 비가 광양 옥룡사로 옮 겨져서 건립되기까지는 다시 20년이 소요되고 그 동안에는 개성 국 청사(國淸寺)에 있었다. 도선국사비는 드디어 운암사에서 옥룡사로 옮긴 주지 지문(志文)에 의하여 명종 2년(1172년)에 광양현 세공선 으로 국청사에서 옥룡사에 옮겨져 건립되었다. 이렇게 우여곡절 끝에 건립된 이 비는 대대로 유존되어 오다가 금 세기의 왜정시대 초에 사라져 그 흔적조차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2003년에 본래 자리에 있었던 비와 부도전지를 조사∙확인된 장소 에 복원하여 현재 비가 세워져 있다.

 

3. 통진대사비(洞眞大師碑)

㉮ 소재지 :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 시기 : 고려
㉰ 연혁 및 현황 이 비는 앞의 도선국사비와 함께 나란히 옥룡사의 비석거리에 있었으나 1920년경에 본래의 비는 파괴되어 없어졌으며 비문「朝鮮金石總覽」上에 수록되어 전하고 있는데 비 편의 일부가 동국대학교 박물관과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이 비의 주인공인 통진대사는 서기 869년에 태어나 서기 948년에 입적 하였다 자는 광종(光宗)이며 경보(慶甫)는 법명이고 경북 경주(계림=구 림)에서 출생하였다. 서기 892년에 입당(入唐)하여 서기 921 년에 귀국하였는데 이 때 후백제의 견훤이 전주에 있는 남복선 원(南福禪院)에 머물게 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그 뒤 고려 2대 혜종과 3대 정종의 왕사가 되었으며 정종의 명으로 개경에서 머물다가 옥룡사로 돌아와서 머물렀는데 나이 80세이던 서기 948년에 입적하자 정종은 옥룡선화상(玉龍禪和尙)이라고 부 르고 통진대사(洞眞大師)라는 시호와 보운(寶雲)이라는 탑명 을 내렸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천통(泉通)과 현가(玄可)등이 있었다. 비는 그의 입적 10년 뒤인 958년 8월에 만들어 졌는데 비문은 제자인 현가(玄可)가 쓰고 계묵(繼)이 새겼다 2003 년 본래 자리에 세워졌던 비와 부도전지를 조사∙확인된 장소 에 복원하여 현재 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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