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물유적

관방유적성(城)

분류 : 관방유적

간략설명 : 성(城) 1) 마로산성(馬老山城) 이 산성은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와 용강리, 죽림리 등 3개리의 경계 를 이루고 있는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용강리 와룡 마을에서 산성에 오르려면 마을 뒤편에 나있는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 라가면 산성에 이를 수 있다. 산성은 마로산의 정상부와 능선에 걸쳐 형성 되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

1. 마로산성(馬老山城)
이 산성은 전남 광양시 광양읍 사곡리와 용강리, 죽림리 등 3개리의 경계 를 이루고 있는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에 자리잡고 있다. 용강리 와룡 마을에서 산성에 오르려면 마을 뒤편에 나있는 산길을 따라 20분 정도 올 라가면 산성에 이를 수 있다. 산성은 마로산의 정상부와 능선에 걸쳐 형성 되어 있으며 남쪽으로는 광양만과 순천 왜성이, 북서쪽으로는 광양읍이, 남 동쪽으로는 광양-진주간 남해고속도로가 한눈에 보인다. 그리고 남서쪽 약 6.7㎞ 지점에는 백제시대 석성으로 조사된 순천 검단산성이 자리하고 있다.
총 길이가 550m 정도인 마로산성은 면적이 약 18,945㎡이다. 남-북방 향에서 서쪽으로 약 30˚ 정도 치우친 말각장방형의 형상을 띠고 있는데, 남쪽과 북쪽 모서리가 높고 성의 중심부는 비교적 평탄한 지형을 이루고 있 는 전형적인 마안봉(馬鞍峰)형태의 지형이다. 마안봉은 말안장과 같이 양 쪽이 높고 가운데가 잘룩하게 낮게된 지형으로 고종 4년(1867) 신관호가 쓴 민보집설(民堡輯設)에 의하면 고로봉( 峰), 사봉(蒜峰), 사모봉(紗 帽峰)과 함께 산성 축조에 유리한 지형으로 보고 있다. 성벽은 자연석에 가 까운 할석을 이용하여 내외벽을 쌓은 협축식으로 축조하였고, 면이 고 른 쪽을 수평으로 맞추어 쌓아 올렸으며 돌 사이의 빈 공간은 잔돌을 끼워 넣었다. 성벽의 석재는 장방형, 부정형의 자연 할석과 판석 등을 이용하여 쌓았다. 산성의 너비는 약 5.5m이며,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약 1.6~3m 정도 이다.
이 산성에 대하여 1998년에 지표조사를 실시한 결과 초축이 백제시대 후기에 이루어졌으며, 통일신라시대까지 꾸준히 활용되어왔다는 점이 밝 혀져 그 다음 해인 1999년 8월 5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73호로 지정되 었다. 그 후에 마로산성의 성격을 보다 더 자세히 규명하기 위하여 제1차 발굴조사를 2001년 9월 18부터 2002년 2월 26일까지 실시하였으며, 제2 차 발굴조사를 2002년 10월 25일부터 2003년 1월 7일까지 실시하였다. 1차 발굴조사에서 성벽뿐만 아니라 건물지 7동, 수혈유구 4기, 문지 1곳, 치 2개소 등의 많은 유구와 기와류, 토기류, 철기류, 청동기류 등의 다양한 유물들이 조사되었다. 기와에는 명문와로‘馬老官’‘甲’‘官年末’‘年天’ ‘□官’등이 있고, 15여 종의 수막새가 출토되었다. 막새는 5엽 복판양식의 연화문, 4엽 변형화문, 원문, 4엽 연화문, 연화문과 파문, 당초문과 파문 등 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문양이 많아 아주 귀중한 자료로 활용될 것으로 본다. 명문와 가운데‘馬老’명의 기와는 아주 중요하다. 삼 국사기에 의하면 광양지역은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 중반기(8세기 중엽)까지 마로현(馬老縣)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러한 명문와가 발견되어 마로산성이 백제시대부터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기까지 이 지역의 치소였다 는 점이 증명된 셈이다.
토기는 줄무늬병, 덧무늬병, 고배, 개배, 호, 방추차, 기타 토기편 등이며, 철기는 물미, 도끼, 낫, 칼, 화살촉, 화로, 못, 용도미상의 철기류 등 이다. 그 리고 특이하게도 동경(銅鏡)이 3점 출토되었는데 직경 18.5㎝의 원형 동 경 표면에‘왕가조경(王家造鏡)’이라는 명문이 양각되어 있고, 직경 9㎝ 크기의 방형 동경은 중앙에 개구리모양의 경뉴룰 중심으로 네방향으로 올챙이가 표현되어 있는 해수포도경이었다.

2차 발굴조사에서는 건물지 4동, 문지 1 곳, 집수정 4곳, 10여기 이상의 수혈유구 등 이 조사되었다. 그리고 유물은 토기류∙기 와류∙철기류∙자기류 등이다. 토기는 대부 분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동체부에 돌대가 돌려진 대형호편, 줄무늬토기편, 사각병, 편 구병 등이다. 사각병은 수혈유구 내에서 출 토되었는데, 이러한 병은 광양 옥룡사지, 영 암 구림리 토기 요지, 이천 설봉산성, 미륵사 지, 아찬산성 등의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기와는 역시 백제와 통일신라 시대의 것이 대부분이었으며, 자기류는 우리나라의 것은 1점도 없으며 중 국제 해무리굽 청자와 백자편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중국제 청자와 백자는 완도 청해진에서 출토된 바 있으며, 인근의 광양 옥룡사지에서도 중국제 해 무리굽 청자가 출토되어 대외교류 현상도 파악해 볼 수 있는 자료이다. 철 기류는 철제솥, 철제호등, 철부, 철제화로, 철제관, 철제보습, 용도미상의 철 기류 등이 있는데 철제호등은 미륵사지 출토품과 동일한 것으로 주목된다. 광양시에 있는 마로산성이나 불암산성과 같은 형식의 백제시대 산성이 전남동부지역에 15개 정도 알려져 있는데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점에서 기 존의 백제 산성들과 공통점이 있을 뿐만 아니라 아주 특이한 특징을 지니 고 있다.
첫째, 산성의 입지조건은 낮은 산이라도 사방을 훤히 살펴 볼 수 있는 입 지에 산성을 축성(마로산성, 검단산성, 남양리산성)한 경우와 배후에 더 높 은 봉우리가 있으나 중간의 낮은 봉우리에 산성을 축성(불암산성, 성암산 성, 난봉산성, 고락산성, 척산산성, 독치성)한 경우 등 2가지로 구분된다. 이 산성들은 모두 산 정상부를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므로 자연히 계곡을 포함하고 있는데 한결같이 계곡방향으로 성벽이 내려와 있다. 산정 의 일정한 공간을 둘러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이라 할지라도 한쪽은 산 정 상부쪽에 성벽이 있고 그 반대편은 산의 중복까지 성벽이 내려와 있는 입 지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이러한 입지조건은 백제산성의 한 특징으로 지 적되고 있다.
그리고 마로산성, 검단단성, 고락산성, 척산산성, 성암산성, 난봉산성, 독치성 등 인근에 백제 후기에 속한 고분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들 고분들 은 6세기 중반 이후의 석곽묘와 횡구식석실분이어서 산성과 밀접한 관계 가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둘째, 이 지역의 산성들은 해발 100~255m 사이의 낮은 산에 분포하고 있으며, 산성의 규모도 264~550m 정도로 소규모인 점이 특징이다. 반면 에 이 지역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이후에 축성된 산성(여수 호랑산성, 순천 오성산성과 운알령성)은 해발 400m 이상의 비교적 높은 산에 위치하고 있다.
백제의 산성이 이와 같이 규모가 작은 이유를 함인호는“백제는 그 지리 적 위치로 하여 대륙의 침략세력과 맞서 싸우는 큰 전쟁을 겪지 않고 장성 한 나라였다. 다만 주변 소국(小國)들을 정복하거나 그 침입을 막는 것이면 충분하였었다. 그러므로 백제의 성은 고구려에서처럼 큰 적과 맞서 장기 적인 싸움을 할 수 있는 규모와 구조를 가진 성곽으로 발전하지 못하였던 것이다.”라고 하여 대외적인 투쟁사에서 그 연유를 찾고 있다. 셋째, 산성의 축성재료가 모두 석재이며, 산성의 형식이 테뫼식 가운데서 도 산복식을 이루고 있다. 백제 산성들은 토성도 많으나 섬진강 서안에 분 포되어 있는 산성들은 토성들보다 석성들이 압도적으로 많아 국경지대의 방어시설에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넷째, 산성의 축성기법이 일반적으로 백제 석성들은 편축식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 지역의 산성들은 예외없이 협축식(夾築式: 내외벽을 모두 돌로 쌓은 형식)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 또 하나의 큰 특징이다. 그리고 체성의 내외벽 너비가 거의 500cm 정도로 일정하다. 체성은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거의 수직으로 쌓고 있으며, 위아래의 성돌 크기가 비슷하여 체성의 견고성이 문제가 되어 외벽의 하단에 점토나 석비레로 다짐하였다. 고구려 나 신라에서처럼 별도의 기단보축시설을 하지 않은 점도 특징이다. 다섯째, 산성의 이용시기가 거의 백제 후기에 국한하고 있어 아주 짧다는 점이다. 검단산성과 고락산성의 발굴조사 결과 이 산성들에서 백제시기에 해당하는 유물들만 한정해서 출토될 뿐 다른 시기의 유물이 일체 보이지 않고 있다. 이 지역이 신라에 편입되자 곧 산성의 생명이 다하였다는 점 을 웅변해 주고 있으며, 비록 전남 동부지역이 백제의 최변방 지역이었지만 백제 중앙정부에서 볼 때 아주 중요시되었던 국경지대였다는 사실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광양의 마로산성에서만 예외적으로 통일신라 유물들이 출토되고 있다. 아마도 이 산성은 마로현(馬老縣)의 치소(治所)였기 때문에 계속해서 통일신라시대까지 산성이 이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섯째, 삼국시대 산성에서 문지의 위치는 계곡 주변을 택하여 계곡의 방 향과 약간 비켜선 방향에 성문을 만들거나, 아니면 능선 주변을 택하되 역 시 능선의 정상부에서 약간 비켜선 경사면에 성문을 만드는 것이 공통적인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전남 동부지역의 산성들에서 문지가 확인된 산성 은 마로산성, 불암산성, 검단산성, 고락산성, 독치성 등인데 역시 이러한 위 치에 문지가 위치하고 있어 백제 중앙지역과 동일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문지를 이루고 있는 체성의 평면 형태가 문지의 외벽선이 호를 그 린 반면 내벽선은 직각을 이루고 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마로산성의 남문 지에서만 내외벽의 모서리 부분이 호를 이루고 있다.
일곱째, 산성의 수원확보 문제이다. 백제 산성들은 산정의 일부분을 둘러 싸고 있는 테뫼식 산성들이므로 수원확보가 어려울 것이라고 하였는데 마 로산성, 검단산성, 고락산성 등의 발굴조사 결과 우물과 집수정 유구가 발 견되었다. 우물과 집수정은 토광을 파고 그 내부에 우물벽을 돌이나 나무 로 축조하였는데 토광과 우물벽 사이에 점질이 강한 점토를 1m 이상 꽉 채 워 넣어 한번 물이 이 안으로 들어오면 밖으로 빠지지 않게 아주 치밀한 계 획하에 만들었다. 수원확보에 그만큼 노력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 여주고 있는 증거이다. 지표조사에서는 이러한 유구들을 확인할 수 없는 한 계점이 있다.
여덟째, 이 지역의 산성 유적에서는 암키와의 내면에 승문(繩文)이 있는 기와들이 아주 많이 출토 되고 있다. 다른 유적에서는 이 평기와가 아주 희 귀하게 출토된 반면에 이 지역의 산성들에서는 예외 없이 많이 출토되어 지역성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도 큰 특징이다.

 

2. 중흥산성

 

광양시 옥룡면 운평리에 자리잡고 있는 고려시대 산성으로, 1999년 12 월 30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78호로 지정되었다. 이 산성은『호남읍지 (湖南邑誌)』(1895년), 『광양군지(光陽郡誌)』(1925년)에“현의 북쪽 15 리에 위치한 성으로 둘레는 800척이며, 성내에 계곡이 1개 있으며, 계곡 위 에 큰 탑이 1개 있으나 폐쇠되고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의 기타 지 지류에도“현의 북쪽 15리에 있다”라고만 기록되어 있어 문헌으로 중흥산성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중흥산성은 산 전체가 천연적인 요 새를 이루고 있으며, 능선을 따라 흙으 로 쌓아 만들어진 토성이다. 광양시에 서 조사된 산성 가운데 유일한 토성이 며, 규모면에서도 가장 크다. 산성의 둘레가 약 4km이 며 , 성내면적은 488,823㎡이다.
이 산성은 해발 278.2m~406.4m의 6개 산봉우리를 아우르면서 포곡형으로 이루어진 산성인데, 동쪽부분은 산 능선을 따라 만들어진 외성 안쪽에 약 240m에 이르는 내성을 흙으로 쌓 고 있는 내외 2중성이다. 산성은 전체적으로 동-서가 장축인 장방형의 형 태를 하고 있다. 산성의 서북쪽이 비교적 해발고도가 높고, 남동쪽이 낮은 편이다.
중흥산성은 기록에 그 둘레가 800척이라 하여 산성의 둘레가 약 2.4km 인 것으로 나타나지만 실제 조사 결과 산성의 둘레는 약 4km로 조사되었 다. 토성의 너비는 9~13.5m이다. 높이는 일정하지 않은데 조사된 북벽의 성벽단면을 보면 3m 전후이고 자연지형을 최대한 이용하고 있다. 토성의 흔적은 중흥사로 들어가는 입구 부분을 제외하고는 비교적 잘 남 아 있다. 입구 부분은 사찰의 건립으로 인해 훼손된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성내에는 산림이 우거져 있고, 성의 북동쪽 부분에는 대나무가 우거져 성벽 의 윤곽이 희미하다.
중흥산성은 흙을 단순히 쌓아 올린 것이 아니고, 자연지세를 잘 이용하여 흙을 다져서 쌓은 판축법의 토성이다. 성의 내벽은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안쪽으로 떨어지고 있고, 급경사를 이루는 외벽은 자연지세를 최대한 이용 하여 축조하였는데 외벽하단에 토사 방지를 위한 석축시설이 몇 단씩 확인 되고 있다.
성의 서쪽부분을 가로지르는 도로(林道)가 개설되면서 서남쪽과 서북쪽 의 2개소에서 성벽이 완전히 절개되었다. 이 절개부를 통하여 성벽의 축조 방법을 알 수 있었고, 다수의 와편이 수습되었다.
절개된 성벽 가운데 토층조사를 한 곳은 서북쪽이다. 임도를 개설하면서 만들어진 절개면은 직각으로 잘리지 않아 토층 단면이 비스듬하게 되어 있다. 표토층이 20cm 두께이고 그 아래 80~90cm 정도 두께의 적황색 점토 층 + 명갈색 점토층이 있다. 판축층은 이 층에서부터 일부 보이기 시작하 여 아래로 흑갈색 점토층, 적갈색 점토층, 흑갈색 점토층, 황갈색 점토층, 흑갈색 점토층, 명갈색 점토층, 흑갈색 점토층 순으로 중복되며 견고하게 축조되고 그 아래는 명갈색 점토층이 석비레층 위에 퇴적되어 있었다. 체성 외벽하단에는 판축부에서 약 1m 떨어져서 3단의 석축을 하고 있다. 토층 상에서 보면 판축부와 외벽의 석축사이에는 암갈색 점토층이 충전되어 있 음을 알 수 있다. 이 석축은 길이 40-50cm, 높이 20cm, 너비 30-40cm 정도의 장방형 할석을 이용하였는데, 현재 높이는 60cm 정도이다. 석축부 하단에는 판석형의 기단석이 1단 놓였는데, 상부 석축부보다 15cm 정도 내어 쌓은 형태이다. 외벽의 석축부부터 성벽의 너비를 계산해보면 약 9m 이다.
이 산성에서 수습된 기와류는 대부분 성의 서북쪽에서 임도를 개설하면 서 절개된 성벽 단면에서 수습한 것이다. 중흥산성의 기와는 등문양에 따라 크게 선문(線文), 격자문(格子文), 수지문(樹枝文), 무문(無文), 복합문(複 合文) 등으로 나누어 진다. 그 가운데 수지문과 복합문이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내면에는 모두 포흔이 관찰되는데, 일부 포흔 위로 빗질과 물손질 흔 적이 있는 경우도 있다. 분할방법은 편들이 많아서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힘 들지만 대개 내면에서 1/2~1/3 정도 칼질한 후 부러뜨렸다. 이러한 속성을 지닌 기와는 대체로 고려시기로 편년되고 있다.
그동안 중흥산성은 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것으로 알려져 왔었다. 그러 나 지표조사에서 수습된 유물은 기와류 뿐인데 모두 고려시대에 해당된 것 들 뿐이다. 뿐만 아니라 산성의 축조기법도 외벽의 하단부에 보축의 석축시 설이 있고, 고루지는 않지만 판축기법으로 토성을 축한 점으로 보아 중흥산 성은 고려시대에 축성하였던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축성된 이후 성곽의 기능은 어느 정도 유지되어 오다가 조선전기에 폐성된 것으로 보인다. 1530년(중종 25)에 펴낸『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與地勝覽)』에‘중 흥산 고성(中興山古城)’이라고 나오기 때문이다.
한편 임진왜란 때의 중흥산성은 인근지역의 승병과 의병 집결지이자 물 자공급지로서, 왜군과의 치열한 전투를 벌인 곳으로 전하고 있다. 당시 중 흥산성의 승병과 의병들은 마로산성의 의병과 연합작전을 펼쳤다고 한다. 마로산성-중흥산성-광양읍성-왜교성을 직선으로 이어보면 길쭉한 마름모꼴이 그려지는데 임진왜란 당시 광양읍성의 회복과 군사작전상 우위를 점하기 위해 관군, 의병 그리고 승병이 연대하여 왜교성에 주둔한 소서행장 부대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을 것이다. 구전으로는, 임진왜란 때 승병과 의병의 훈련장으로 쓰였는데 천연적인 요새로 이루어져서 왜병들이 산성 안에 병력이 있는 줄을 몰랐으나 어느날 계곡에서 흘러내려오는 물에 쌀 씻은 물이 허옇게 내려오는 것을 왜병 밀정이 탐지하여 아군을 습격해 큰 피해를 입혔다고 전해지고 있다.

 

3. 불암산성

불암산성은 광양시 진상면 비평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1999년 12월 30 일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77호로 지정되었다. 진상면에서 수어댐으로 가 는 국도를 타고 2㎞ 정도 가면 길 좌측으로 진상면 섬거리(蟾居里)로 들어 가는 길이 나온다. 이 길을 따라 들어가면 수어댐이 나오고 이 댐의 동쪽에 섬거마을이 자리잡고 있다. 섬거마을 뒤쪽에 솟아 있는 표고 231.5m의 산 정상부에 일정 공간을 둘러 싼 테뫼식 산성이 불암산성이다. 산성이 위치한 곳은‘불암산(佛岩山)’이라 부르는 산의 서남 지맥에 해당된다. 산성으로 오르는 길은 섬거마을에서 마을 뒤로 난 등산로를 따라 10분 정도 오르면 산성의 서쪽에 이른다. 또 다른 길은 수어댐 관리사무소에서 소로를 이용해 30여 분 정도 오르면 산성의 남쪽으로 이른다.
불암산성은 동‐서쪽이 장축인 사다리꼴 형태의 석성이다. 산성은 산 정 상부를 중심으로 8부능선을 에워싸면서 축성하였는데 동쪽이 높고 서쪽으 로 내려올수록 낮아진다. 산성이 축조되어 있는 산 자체는 그다지 높은 산 은 아니지만 자연지형을 최대한으로 이용해 축조하였다.
성벽은 대부분 무너져 있고 주변은 거의 잡목으로 덮여 있으며, 무너진 성벽의 너비는 약 18m에 이른다. 자연 지형을 최대한 이용하여 축성하였 기 때문에 성벽의 대부분이 무너진 지금도 성벽 밖에서 접근하기가 어렵다. 성벽 전체의 둘레는 500m정도이다. 체성의 최대 높이는 334㎝이며, 성벽 의 너비는 530~600㎝이다. 그리고 성내 면적은 17,955㎡이다.
성의 북서쪽의 일부구간은 주민들이 산을 개간하여 유실수를 심고 농로 를 만들면서 약 50m정도가 훼손되었다. 성의 북동쪽에는 문지가 있으며 성벽의 대부분은 훼손되었고 일부 구간에서 성벽의 축조상태를 살필 수 있 다. 성의 북동쪽은 급경사를 이루고 있으며 성벽의 잔존 상태가 가장 좋다.남쪽은 성벽이 가장 많이 훼손되어 있으며 칡넝쿨과 잡목들로 우거져 있어 축조상태 등을 확인하기 어렵다. 성의 서쪽 성벽은 다른 곳과 같이 훼손되 었고, 감나무 등의 유실수가 재배되고 있다. 불암산성은 테뫼식 석성으로서 협축식으로 축조되었다. 테뫼식 산성이란 입지상으로 볼 때 산의 중복보다 높은 위치에 자리잡고 있으며 산 정부의 일정한 공간을 둘러싼 형태를 말한다. 따라서 산정식 산성이라고 한다. 또한 이 산성 의 일반적인 형태가 산봉우리에 마치 테를 두른 것처럼 보여 테뫼성 혹은 시루성이라고 부르며 일본인들은 발권식(鉢券式) 산성이라 칭하기 도 한다.
협축식은 성벽의 안팎을 돌로 쌓아 올리는 것을 말하며, 내탁식은 외벽만 을 성돌로 쌓고 안쪽은 흙이나 잡석같은 것으로 뒤채움하는 방식이다. 편축 법 역시 한쪽만을 성돌로 쌓아 올린다는 점에서는 내탁식과 같으나, 내탁이 뒤채움하는 흙을 성안에서 파서 뒤채움하는 관계로 성내에 자연히 내호가 생기게 되는 반면에 편축식은 내고외저의 지형에서 외벽만을 쌓아 올리고 안쪽은 성내의 높은 지형을 삭토하여 뒤채움하는 관계로 성내에 내호가 아 닌 회랑도가 생기도록 하는 방법이다.
협축부분의 성벽하부는 석비레층이나 암반 위까지 파서 기초를 자연적 으로 튼튼하게 한 후에 별도의 기단을 두지 않고 곧바로 벽을 쌓아 올렸다. 벽석은 20~80cm 크기의 할석을 사용하여 면이 고른 쪽을 수평으로 맞추 어 쌓아 올렸고 정연하지 않은 면은 그 사이 사이에 잔돌로 쐐기를 박았다. 성돌로 이용된 할석은 부정형의 자연할석도 있고 판석과 같은 모양도 있으 며 약간 손질하여 다듬은 듯한 석재도 있다. 성돌의 크기는 상하 석재에 차 이가 거의 없다. 그리고 체성의 외벽을 보호하기 위해 아래에서 2~3단의 벽석 높이까지 다짐한 흔적이 보인다. 또한 경사면 지역을 수평 쌓기 방식 으로 쌓아 올리고 있는데 이는 성벽의 붕괴를 방지하기 위한 배려라고 생 각된다. 즉 경사면 지역을 경사면과 평행하게 성벽을 쌓는다면 결국 경사면 아래쪽으로 모든 성돌의 하중이 모이게 되고, 그렇게 되면 경사면 아래쪽의 성돌은 결국 위에서 내려오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쉽게 붕괴되고 말 것 이다. 따라서 이렇게 성벽의 하중이 아래쪽으로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해서 성벽을 수평 쌓기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벽의 하중을 골고 루 분산시켜 성벽이 붕괴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불암산성에서 수습된 기와는 마로산성과 달리 백제시대의 것으로 한정 되는데, 문양의 형태나 기와의 분할방법은 마로산성의 백제기와와 동일하 다. 불암산성에서도 백제기와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모골흔의 평기와들 이 적지 않게 확인되었다. 모골흔이 있는 평기와는 모두 암키와이다. 이외 에 인각와 1점이 수습되어 주목된다. 이 인각와는 배면에 이중의 원이 표현 되고, 그 내부에‘십(十)’자가 양각되었다. 이와 같은 인각와는 백제시대의 기와에서 주로 확인되고 있다.
불암산성에서 수습된 토기편은 회청색의 경질 토기편으로 삿자리문, 격 자문, 복합문, 무문, 평행타날문 등이 시문되어 있다. 그 중 평행타날문이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격자문 가운데에는 기와 외면에 시문된 것과 동 일한 것이 있어 같은 고판에 의해 토기와 기와가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기형상으로는 평저 직구호, 외반구연호, 원저 단경호, 대옹 등이어서 백제 계통의 토기로 보인다.
석환은 불암산성에서 10여 점 수습되었다. 이 석환들은 타원형의 천석 (川石)으로서 인근의 하천에서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평면형태는 타원형, 원형, 부정형 등이다. 크기에 따라 3종류로 나누어지는데, 대형은 소수이고 중∙소형이 많다. 대형은 길이가 30cm 내외이고, 중형은 20cm, 소형은 10cm 정도의 크기이다. 석환의 용도는 성 가까이 접근한 적을 물리칠 때 사용된 무기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은 축성기법과 출토유물로 보아 불암산성은 백제시대 후기에 축 조되어 사용되어 오다가 백제가 멸망하면서 그 기능이 다하였던 것으로 추 정된다.
그리고 불암산성은『호남읍지(湖南邑誌)』(1895년), 『광양군지(光陽郡 誌)』(1925년)에“현의 동쪽 50리에 위치한 성으로 둘레는 500척이며, 성 내에 우물이 1개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의 기타 지지류에도“현의 북쪽 50리에 있으며, 지금은 폐쇄되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구 전에는 삼한시대에 쌓여진 성이라고 하며, 임진왜란과 구한말 의병활동에 도 활용된 것으로 전해져 오고 있다. 그렇지만 앞에서 본바와 같이 지표조 사 결과 백제시기의 유물들만 출토되고 있는 점으로 보아 앞으로 발굴조사 가 진행되어야만이 더 자세한 성격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4. 봉암산성

봉암산성의 초축에 관하여서는 삼국시대부터 산성이 있었다는 설과 임진왜란 시기에 쌓았다는 설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나, 임진왜란 시기에 해당하는 유물은 수습할 수 없었고, 다만 회청색 경질토기편을 1점 수습하였는데, 명확한 시기를 알 수 없다. 테뫼식이라는 산성의 형식과 축조 기 법으로 보아 삼국시대(백제)에 초축되었을 가능 성도 배제할 수 없으며 규모가 작아 보루성으로 추정된다.
봉암산성은 광양시 진월면 신아리 해발 170m 고지에 자리잡고 있다. 지 도상에는‘봉임산성(鳳任山城)’으로 표기되어 있는 산성이다. 이 산성은 동쪽으로는 섬진강 건너 하동군 금성면 일대가 보이며 서쪽으로는 진월면 일대가 훤히 바라다 보인다. 산성의 남서쪽으로 섬진강변이 연하고 있어 강 건너 하동쪽의 산성과 더불어 지형적으로 중요한 요새임을 알 수 있으며, 산성의 북서쪽방향으로 약 4.8km 떨어진 곳에 불암산성이 위치한다. 산성 은 진월면 아동마을에서 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따라 30여 분 정도 올라가 면 성의 남쪽부분에 이르게 되며, 성의 서북쪽으로 난 등산로를 이용해 성 에 이를 수도 있다.
봉암산성은 동서축으로 긴 타원형을 하고 있으며, 산정상부의 일정한 공 간을 둘러싸고 있는 산정식 산성이다. 산정식 산성의 일반적인 형태가 산 정상부에 테를 두른 것처럼 성을 쌓아 테뫼성 혹은 시루성이라고도 한다. 산성의 총길이는 약 100m로서 소형이며, 면적은 1,422㎡이다. 그리고 성의 너비는 약 520cm이다. 현재 잔존한 내벽의 높이가 약 150cm, 외벽의 높이가 약 90cm로 외벽보다 내벽이 잘 남아 있다. 내벽의 경우 남쪽 일부 분이 허물어졌지만 비교적 잘 남아 9단의 석축이 확인된다. 현재 성안에는 건물지나 문지 등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
봉암산성은 다른 산성에 비해 정비가 잘 되어 있는데 이는 성 내부에 위 치한 민묘의 관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민묘는 정남향으로 1기 있으며, 민묘 상석에는 명문이 있다. 봉암산성은 산 정상을 중심으로 하여 9부 능선에 해당하는 정상부를 따라 석축한 테뫼식 산성이면서 또한 성벽의 안팎을 모두 돌로 축성한 내외협축식 산성이다. 성 외벽은 성의 남쪽이 잔존상태가 가장 양호한데, 현재 6단 정도가 남아 있어 축조상태를 알 수 있고 높이는 약 90cm이다. 외벽의 축조방법은 15×40cm정도 크기의 할석을 이용하여 수평쌓기를 하였다. 내벽은 현재 9단이 남아 있으며, 높이 는 약 150cm이다. 내벽 역시 할석으로 외벽과 같이 수평쌓기 방식으로 축 조되었다. 내외벽 모두 정연하지 않은 면은 그 사이사이에 잔돌로 쐐기를 박았다. 성돌로 이용된 할석은 부정형의 자연할석도 있고 판석과 같은 모양 도 있으며 약간 손질하여 다듬은 듯한 석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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