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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물효열부 (孝烈婦. 현대인물 포함)

분류 : 조선시대의 인물

간략설명 : [조선시대의 인물] 효열부 (孝烈婦. 현대인물 포함)

효열부 (孝烈婦. 현대인물 포함)

강씨(姜氏. 柳聖淳의 婦人) :

30살때 남편이 죽고 시어머니를 극진히 봉양하였으며 어린아이들을 잘 길러 모범적인 효부(孝婦)가 되었음. 향리(鄕里)에서 포상을 받았음. (손, 옥곡면 장동리 유길성)

강씨(姜氏. 鄭容範의 부인)

시부모 봉양에 극진하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으며 근검으로 치산(治産)하였음. 1964년‘도지사 표창’을 받았음. (장자, 골약동 성황리 정형기)

강씨(姜氏. 金吾得의 부인)

아버지가 죽은 15일뒤에 또 남편이 죽었음. 고아가된 시숙(媤叔)을 돌보아 결혼 시킨뒤에 남편의 묘(墓)로 가서 목매어 죽으려했으나 미수에 그쳤으며 모두 효열부(孝烈夫)라 칭송했음.

강씨(姜氏. 金希舜의 부인)

시집간 후 바로 남편이 죽었으나 종신 수절(守節)하였음.

강씨(姜氏. 鄭琯和의 부인)

남편이 죽은 후 시부모를 지성으로 모시며 종신 수절하였음.

강씨(姜氏. 정용구의 부인)

20살때 남편이 죽었으나 딸 하나를 기르며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수절하였음.

강씨(姜氏. 鄭容善의 부인)

18살때 시집가서 1년뒤에 남편이 죽었으나 종신토록 수절했음.

김서운남(金瑞雲南)

1907년 광양읍 세승 출신. 마을입구에 열부의 행적을 기리는 비가 세워졌음.

김씨(金氏. 이승철의 부인)

18살때 시집가서 25살때 남편이 죽고 종신토록 수절하며살았음.

김씨(金氏. 李容燮의 부인)

남편은 반신불수, 8순(八旬)의 시어머니는 시력을 완전히 잃었으나 정성을 다하여 부도(婦道)와 효도를 다하였음.

김씨(金氏. 徐種祿의 부인)

정유난 때 남편이 죽고 시동생과 가난하고 어려운 생활을 하며 수절하여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세웠음. (13대손,옥룡면 산남리 서재열)

김씨(金氏. 배진섭의 부인)

24살때 남편이 죽고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며 자식들을 기르고 종신토록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白之鎭의 부인)

남편과시아버지임종때각각손가락을잘라주혈(注血)하였음.

김씨(金氏. 鄭厚烈의 부인)

23살때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고 죽은뒤에는 종신토록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鄭東鎭의 부인)

18살때 남편이 죽고 종신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白文寅의 부인)

22살때 남편이 죽고 종신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朴俊一의 부인)

남편이 동학난에 가담하여 사형당한 후 종신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朴準文의 부인)

19살때 남편이 죽고 종신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徐周植의 부인)

25살때 남편이 죽고 시부모와 자식들을 위하여 종신 수절하였음. (자, 옥룡면 동곡리 서병관)

김씨(金氏. 鄭源烈의 부인)

23살때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혈(注血)하였고 수절하며 효도하고 자식들을 길렀음. 모성공회(慕聖公會)에서 찬양문(讚揚文)을 내렸음.(손, 정병화)

김씨(金氏. 金鍾河의 부인)

남편 임종시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1927년 모성공회에서 찬양문을 내렸음. (손, 김동훈)

김씨(金氏. 서돈흠의 부인)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감찰사가 표창하였음.

김씨(金氏. 崔春九의 부인)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으나 효력이 없자 팔뚝 까지 자르며 정성을 다했음.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세웠음.

김씨(金氏. 白基洛의 부인)

남편의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고 그 후 시부모에게 효도하며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鄭元憲의 부인)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팔뚝을 잘라 주혈하여 회생시켰음.

김씨(金氏. 李德模의 부인)

불구인 시부모에게 효성을 다하고 남편을 지성으로 받들었음.

김씨(金氏. 申得模의 부인)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음.

김씨(金氏. 安國의 부인)

처녀때 어머니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했고 시집가서 남편이 죽자 11년간 고기를 먹지 않았으며 뒷날 괴한에게 몸을 더럽히자 스스로 목숨을 끊었음. (철종7년 1856년에 표창받았다.)

김씨(金氏. 白元鎭의부인)

남편과 시아버지가 위독할때 각각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고 남편이 죽은 뒤에는 시부모에 효도하며 자녀를 기르고 수절하였음.

김씨(金氏. 진경호의 부인)

젊어서 남편이 죽고 종신 수절했음.

김씨(金氏. 黃祐錫의 부인)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했음. 『윤강록(倫綱錄)』과『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 등재되어 있음.

김광숙(金光淑. 김재훤의 부인)

1947년 광양읍 신기 출신. 효행으로 1983년 대한노인회 전라남도 연합회장 표창 수상

김말남(金末男)

1931년 골약동 기동 출신. 23세때 남편을 여의고 시어머니에 대한 지극한 효행으로 널리 그 덕성이 알려졌음.

김봉순(金鳳順. 황영수의 부인)

골약동 성황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1964년 도지사상을 수상

김순희(金順姬)

1931년 광양읍 도청 출신. 20년간 병든 시부모에게 정성어린 간병으로 효성을 다하여 1982년‘대한노인회 전남지부장’으로부터 표창 수상

김씨(金氏. 崔春九의 부인)

남편이 죽은후 수절하여 열녀의 행적을 보여, 고종22년에 표창받았음. 『(湖南古今儒林譜神錄』에등재됨)

김월심(金月心)

1877년 광양읍 월평 출신. 병든 남편을 침식을 잃고 지극정성으로 간호하였으며 임종시에는 단지주혈로 얼마간 연명케하고 사후에는 노모봉양과 자녀교육에 몸을 바쳐 인근마을에서 그 효성에 감동하였음.

김말순(金末順. 咸義植의 부인)

앞을 못 보는 시어머니에게 지성으로 효도하여 1983년 노인회에서 시상(施賞)했음. (자, 옥룡면 추산리 함형채)

김선례(金善禮. 徐敬淳의 부인)

시부모에 지극한 효성으로 1977년‘전남도지사 상’을 받았음. (자, 옥룡면 용곡리 서광수)

김씨(金氏. 白文寅의 부인)

20살때 남편이 죽고 시부모를 섬기며 수절하였음.(4대손, 옥곡면 신금리 백홍근)

김미남(金未南. 韓春奉의부인)

23살때 남편이 죽고 시부모에 효도하며 수절하였음.(자, 중동 한철희)

김씨(金氏. 姜源欽의 부인)

남편의 병이 위독할 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여‘모성공회’찬양문을 내렸음.(손, 진월면 진정리 강철주)

김씨(金氏. 姜致飮의 부인)

남편 위독시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으며, 조선환여승람에 찬양문이 있음.

김씨(金氏. 朴準亨의 부인)

17살에 시집와서 효도와 부덕을 다하였으나 남편이 난치병에 걸리자 매일밤 하늘에 기원하며 금식하다 졸도했음. 남편이 죽자 시부모가 만류 하여도 듣지 않고 애통하여 모성공회(慕聖公會)에서 찬양했음.

김씨(金氏)

1856년 광양읍 대실 출신. 시집오자마자 부군을 잃고도 한평생 부군의 영혼마을 믿고 수절하였음.

김영자(金영子)

1929년 광양읍 신흥 출신. 효부. 어버이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어른 공경심이 타의 귀감이 되어 전남도지사상을 수상하였음.

김점희(金点熙)

남편이 일찍 죽고 시부모마저 노환이 들었으나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고 자식교육에 헌신하였음.

김윤남(金允南. 鄭順基의 부인)

17살때 가난한 집으로 시집와서 8개월만에 남편이 군(軍)에 가서 전사하니 유복녀(遺服女) 하나를 기르며 나무하고 채소를 가꾸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우애와 친족화목을 도모하니 칭찬이 자자했음. 수성당 표창을 받았음(양자, 봉강면 봉당리 정현종)

김숙자(金淑子. 高明化의부인)

94살의 시조부모 봉양에 지극한 효도를 다했음. (다압면 도사리).

김말례(金末禮. 金相瓚의 3子婦)

1936년 태인동 용지 출신. 시아버지가 3년 6개월간 와병중 정성을 다하여 약(藥)을 대리고 대∙소변을 혼자서 받아내는 효성을 다하여 보건사회부장관 표창을 수상함(1989)

나씨(羅氏. 姜永玟의 부인)

시아버지의 몸에 악성 종기가 심하자 입으로 빨아서 낫게하였고 임종때는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음. (4대손, 옥룡면 죽천리 강도원)

나씨(羅氏. 姜大昊의 부인)

남편이 병으로 위급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했고 시부모의 병간호에 정성을 다하여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세웠음.

나점례(羅點禮. 金道允의 부인)

남편이 죽은 후 3년상을 예를 다하여 정중히 치르고 수절하며 치산(治産)하여‘마을상’, ‘군민효행상(群民孝行賞)’을 받았음.

나옥순(羅玉順)

18살때 신(申)씨 집안에 시집와서 15년간 중풍든 시아버지의 병간호를 지성으로 했음.

문씨(文氏. 姜禧永의 부인)

남편이 오랫동안 학질로 신음하자 온갖 약초를 구해다 치료에 정성을 다했으나 효과가 없자 허벅지 살을 떼어 구어먹여 완쾌시켰음.

박씨(朴氏. 金容琪의부인)

시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였음. 판서 민병한(閔炳漢)이 그 아름다운 행적을 기록하였음.

박씨(朴氏. 金永煥의부인)

와병중의 남편을 9년간 지성으로 간병하였고 죽은 후에는 종신 수절하였음.

박씨(朴氏. 徐正守의 부인)

남편 임종때 손가락피를 내어 주혈하였고 죽은 후에는 수절하였음.

박씨(朴氏)

상주 박씨로 18년간 시아버지를 극진히 간병하여 1982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음.

박득례(朴得禮. 朴信立의 딸)

13살때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혈하였음.『(朝鮮 輿勝覽』에등재되어있다)

박씨(朴氏. 鄭勛熙의부인)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자녀들을 강인하게 길러 효부(孝婦)와 열부(烈夫)를 겸비하였다고 칭찬이 자자하였음.

박복임(朴福任. 具敎成의 부인)

노병중의 시어머니에 3년 6개월 동안 간병하여 대한 노인회에서 표창하였음.

박복이(朴福伊, 李元龍의 딸)

남편과 사별한 후 시부모에 효도, 청상수절 함. 대한노인회에서 표창하였음.

박씨(朴氏. 徐漢鎬의 부인)

남편이 위급할때 팔을 베어 주혈하였음. (손, 옥룡면 죽천리 서병수)

박씨(朴氏. 金萬浩의 부인)

바느질품팔이를 해가며 시부모에 효도하였으며, 도지사 표창을 받았음.

박달막(朴達莫. 전주이씨의 부인)

고려 의종24(1170) 경인년(庚寅年), ‘무신의 난’때 22살로 남편이 죽고 시부모에게 지극효성을 다하며 어린 자식들을 의롭게 길러 집안을 일으켰음.

박양숙(朴良淑)

1918년 진월면 돈탁 출신. 17살 때 김씨 집으로 시집와서 27년간 시어머니의 중풍병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고 형제간에 우애하고 친족간에도 화목을 도모하여 향리에 칭송이 자자하여 효부상을 수상하였음.

박씨(朴氏. 서용진의 처)

1882년 옥곡면 오동 출신. 혼인 몇 개월만에 남편을 여의고 유복자를 키우면서 시부모를 지극한 정성으로 모셨으며, 성모공회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음.

박씨(朴氏. 姜鳳鉉의 부인)

시부모가 병으로 위독하자 단(壇)을 설치하고 하늘에 기원하였던 바 꿈에 화사탕(化蛇湯)을 먹이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하여 완쾌하였음.

백씨(白氏. 金稍柱의 부인)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시부모에게 효도하여‘모성공회’에서 표창 받았음. (후손, 진월면 진정리 김금룡)

서씨(徐氏. 南廷昊, 일명 多福의 부인)

남편이 일본에 건너가 그곳에서 죽었으나 시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며 사니‘모성공회’의 천거로 비(碑)를 세웠음. (자, 봉강면 봉당리 남두칠)

서씨(徐氏. 李泰涉의 부인)

남편의 임종때 허벅지 살을 베어 주혈하였고 시어머니에게 효도하였음.

서씨(鄭永福의 부인)

시어머니가 종기가 심해 농을 빨아 치유케하는 등 효심이 지극함.

서씨(徐氏. 李大福의부인)

시어머니의 악성 종양을 입으로 빨아 낫게 하고 효도하였음.

서씨(徐氏. 李基昊의 부인)

13년간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죽은 뒤에는 3년간 거려(居廬: 상제가 되어 여막(廬幕)에서 사는 것) 하였음.

서씨(徐氏. 羅鍾旬의 부인)

시부모에 효도하고 경로심이 강해 1980년 전라도지사가 표창하였음. (자, 옥룡면 용곡리 초장마을 나경수)

서선자(徐善子, 문병수의 처)

1961년 옥곡면 대전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보건복지부장관상을 수상하였음.

서양례(徐良禮. 鄭致基의 부인)

23살때 남편이 죽자 3년간 시묘(侍墓)하여 1959년 수성당(壽星堂)에서표창하였음. (옥곡면 장동리)

서봉임(徐鳳任. 金容君의부인)

시부모에게 지극한 효성을 하여‘광양군민의 상’,(1975년)을 받았음. (자, 골약동 도이리 김근수)

서씨(徐氏. 金永儀의 부인)

남편이 30살에 죽고 외아들마저 죽었으나 수절하면서 가업에 충실하여 성균관장의 표창이 있었음.

서차덕(徐且德. 李載溶의 부인)

1908년 골약동 군재 출신. 수십년간 병든 시아버지를 정성으로 간병(看病)하여 1980년 성황리(城隍里)에서 이 효성을 기리기 위해 효부행적비(孝婦行績碑)를 세웠음.

서단엽(徐丹葉. 姜周仁의 부인)

시집온지 1년만에 남편이 죽고 시부모에게 효도를 다하며 수절하였음. ‘군수상’∙‘도지사상’∙‘국회의장상’을 받았음. (자, 골약동 황길리 강희룡)

선덕업(宣德業)

1884년 골약동 군재 출신. 8세에 남편을 여의고 수절하였으며 품행이 방정하여 마을주민들로부터 칭찬이 자자함, 향교상을 수상하였음. 마을에 보성선씨 효열비가 세워졌음.

손복덕(孫福德. 宋守浩의 부인)

시부모에게 효도하여 향교(鄕校)에서 유림 찬양문과 시상(施賞)을 하였음. (자, 옥룡면 용곡리 대방마을 송준수)

손씨(孫氏. 吳在坤의 부인)

가난한 집으로 시집갔으나 근검과 성실로 가세를 일으켜 가문을 위해 많은 재산을 희사(喜捨)했고 시어머니 병을 수 년 동안 정성껏 간병(看病)했음.

송씨(宋氏. 張運烈의 부인)

남편의 간병(看病)에 정성을 다하고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였음. (손, 옥룡면 율천리 장철종)

신씨(辛氏)

광양읍 인동 출신. 어려서부터 효행이 지극하고, 부덕을 겸비하였으며 남편이 사망하자 3년동안 소복차림으로 사후 영생을 기원하는 등 열행으로 1925년에 성모공회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음.

심씨(沈氏. 黃炯模의 부인)

남편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고 자녀들을 훌륭히 키웠음.

심상평(沈上坪. 黃亨權의 부인)

17살 때 시집와서 남편이 중병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수일간 연명하여‘모성공회(慕聖公會)’에서 시상(施賞)하였음. (3대손, 옥룡면 용곡리 황순홍)

안두례(安斗禮)

옥곡면 신촌 출신. 지극한 효성으로 전남도지사상을 수상하였음.

안씨(安氏. 金萬壽의 부인)

15년간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죽은 뒤에 수절하며 시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해‘도지사상’을 받았음. (자, 진월면 마룡리 김문호)

안귀례(安貴禮. 김재두의 부인)

1913년 진상면 섬거 출신.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했으며 자녀교육에 헌신하여 1964년‘대통령 표창’을 받았음. (자, 진상면 섬거리 김용규, 김금선)

양씨(梁氏. 金載希의 부인)

남편과 시아버지의 임종 때 각각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였음.

양신례(梁信禮)

1929년 옥곡면 점기 출신. 한국부인회의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하였음.

오씨(吳氏. 황병중의 부인)

진상면 비촌 출신. 시부모에게 효도가 지극했으며, 남편 임종시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였음. (손, 진상면 비평리 황호연)

오씨(吳氏. 黃鶴模의 부인)

남편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고 시부모에게 효도하였음. (후손, 진상면 비평리 황호열)

오씨 (吳氏. 趙映來의 부인)

열녀의 행위가 있어 효열비(孝烈碑)를 세웠음.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 등재됨

오씨(吾氏. 柳秀養의 부인)

오곡면 곡동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숙부인의 증직을 내렸음.

우씨(禹氏)

광양읍 인동 출신. 몇 년동안 병상에 있는 남편을 위해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사후 여생을 기원하는 등 열행으로 1925년에 모성공회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음.

유인자(柳仁子)

1956년 진월면 신덕 출신. 어버이에 대한 지성스런 효행으로 보건복지부 장관상을 수상하였음.

유병임(兪炳任)

남편이 일제(日帝)징집으로 사망한 뒤 수절하며 부덕을 보여 전남도지사가 표창하였음. (자, 봉강면 봉당리 강대균)

유씨(兪氏. 蔡敬默의 부인)

생후 8개월된 남아를 두고 남편이 죽은 후 종신 수절하여 대한노인회에서 표창하였음. (자, 봉강면 봉당리 채귀동)

유덕이(柳德伊. 李倫沆의 부인)

다압면 내압 출신. 10여년간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임종 때는 손가락 피를 주혈하고 수절하였음.(자, 다압면 신원리 이원생)

윤씨(尹氏. 金鉉錫의 부인)

남편이 중병으로 수년간 고생할 때 밤마다 하늘에 기원하니 꿈에 한노인이 뒷산에 오색(五色)뱀이 있다고 가르쳐주어 이튿날 남편의 어린 동생을 데리고 산에 가니 과연 뱀이 있더니 영초(靈草)로 변하였음. 그것을 캐다가 먹고 병이 나아 정려(旌閭)를 세웠음. (손, 태인동 김재윤)

우옥남(禹玉南, 김정현의 부인)

1937년 광양읍 도청 출신. 2004년 현재 광양시 최고령자 도순심(105세)씨의 며느리로 몇 십년간 지극한 정성과 효심으로 시어머니를 모셔 오랫동안 건강∙장수토록하여 효부상을 수상

이씨(李氏. 鄭斗仁의 부인)

20살 때 남편이 죽고 수절하며 시어머니에게 효도하여 1923년 도지사가 표창 하였음.(손 정학규)

이씨(李氏. 주병수의 부인)

남편이 일찍 죽고 수절하며 시부모에게 효도하여‘모성공회’의‘찬양문’이 있었음.

이씨(李氏. 金畿炫의 부인)

일찍 남편이 죽고 종신 수절하여‘명감보(明鑑譜)’에 등재되어 있음.

이씨(李氏. 유석헌의 부인)

22살때 남편이 죽자 같이 죽으려 했으나 이웃사람 들의 만류로 미수에 그치고 수절했음.

이씨(李氏. 徐鍾善의 부인)

열녀의 행적이 있어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세웠음.

이씨(李氏. 金鍾順의 부인)

어머니 병에 손가락을 잘라 주혈(注血)하고 효심이 지극했음.

이씨(李氏. 鄭基性의 부인)

남편의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으나 죽고 말자 자신도 남편따라 목을 매어 자살했음.

이씨(李氏. 姜運秀의 부인)

광양읍 초남 출신. 청상으로 수절하며 시부모에게 효도하여 마을에 효열비가 세워졌음.

이씨(李氏. 나주완의 부인)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혈했고 불구자가 된 시부모에게 10여년을 정성으로 간병했음.

이씨(김종순의 부인)

시부모의 병환에 정성을 다하였고 손가락을 잘라 피를 주혈했음.

이씨(李氏. 金相楨의 부인)

부덕과 열녀의 행적이『호남지(湖南誌)』에 기록되어 있음.(자, 태인동 김태현)

이씨(李氏. 金在連의 부인)

남편이 위급할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음.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에 등재(손, 진월면 차사리 수화)

이씨(李氏. 羅燾興의 부인)

남편의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고 불구의 시어머니를 10여년간 간병 효도하였음. 『조선환여승람』에 등재.

이명숙(李明淑. 金君鎬의 부인)

병든 늙은 시어머니의 간병을 정성껏 하여 대한노인회에서 표창함.

이봉순(李鳳順)

1936년 옥곡면 백암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전남도지사 표창

이봉순(李鳳淳)

1904년 중마동 오류 출신. 지성으로 남편을 간병하여 성균관장 표창수상

이순악(李順岳)

41살에 정(鄭)씨 집으로 개가하여 7살부터 16살까지 전실소생 7남매를 헌신적으로 길러, 그 중 장남과 3남은 대학을 졸업시키는 등, 부도를 다하여 도지사가‘현모양처 표창’을 하였음.

이씨(李氏. 강운수의 부인)

남편이 일찍 죽자 유복자를 기르며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수절하여 초남리에 열녀각(烈女閣)을 세웠음.

이씨(李氏. 조병수의 부인)

시어머니가 죽자 계모를 맞이하게 하여 효성을 다하고 남편이 병들자 단을 쌓아 하늘에 기원하여‘모성공회’에서 찬양했음.

장순례(張順禮. 孫永培의 부인)

1938년 광양읍 도청 출신. 10년간 시부모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선행부문으로 광양군민의 날(1979)에 광양군민의 상을 수상하였음.

장씨(張氏. 장재동의 여동생)

광양읍 인서 출신. 남편이 위급하자 백방으로 약을 구하여 치료하면서 단지주혈로 2일간 연명케 하였고 사망하자 매년 20일 간을 묘소를 지켜 1925년에 성모공회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음.

전씨(全氏. 崔致欽의 부인)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음.

정씨(鄭氏. 孔載烈의 부인)

남편이 화(禍)를 만나 죽게되자 대신할 것을 원하였으나 받아주지 않자 스스로 자결하여 남편이 그 화를 면할수 있었음. 면(面)에서 시상(施賞)하고 비(碑)를 세웠음.

정씨(鄭氏. 朴正來의 부인)

1896년 광양읍 대실 출신. 21세에 남편을 잃고 순절코자 했으나 뜻을 고쳐먹고 평생 시부모를 극진히 봉양하였음.(손, 광양읍 죽림리 노은)

정씨(鄭氏)

일찍 남편과 사별하고 수절하며 부덕을 보임. 정려건립(태인동 김완현)

정씨(鄭氏. 朴行鎭의 부인)

남편이 위독할 때 팔뚝을 베어 주혈하고 수절하였음.

정씨(鄭氏. 金盛夏의 부인)

18살때 시집와서 남편이 병들자 간병에 정성을 다하여『조선환여승람』에 등재되었음.

정씨(鄭氏. 孫廷基의 부인)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여『조선환여승람』에 등재되었음.

정씨(鄭氏. 李壽永의 부인)

시어머니 임종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조선환여승람』에 등재되었음.

정씨(鄭氏. 朴行鎭의 부인)

시부모가 위독하자 팔뚝을 잘라 피를 주혈하여‘성모공회’에서 찬양문을 내렸음.

정씨(鄭氏. 申濟峰의 부인)

남편을 받들고 시부모에 효도하여 도지사가 표창하였음.(자, 진월면 선소리 신상호)

정씨(鄭氏)

1865년 광양읍 대실 출신. 부군의 병을 고치기 위해 자신의 허벅지 살을 떼어 먹였음.

정순엽(鄭順葉. 李吉琇의 부인)

품행이 단정하고 시어머니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1982년‘율곡노인회’에서 시상(施賞)하였음. (자, 옥룡면 율천리 이상호)

정복덕(鄭福德. 金洪錫의 부인)

시어머니의 악성종양을 10여년간이나 입으로 빨아 치료하여‘모성공회’에서 시상(施賞)하였음. (자, 옥룡면 추산리 김상문)

정향순(鄭香順)

1949년 태인동 용지 출신. 효행이 지극하여 사회규범이 되어 전라남도지사 효행상 수상.

조씨(趙氏. 최상경의 부인)

남편이 동학난(東學亂)에 가담한 죄로 심한 고문을 받으면서도 끝내 함구하였으며 병으로 위독하니 100일간 산신제(山神祭)를 올렸음.

조복래(曺福來. 鄭斗基의 부인)

1919년 황곡 출신. 10여년간 남편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시부모에게 효도하여 1980년 전남도지상을 받았음. (자, 골약동 황길리 정현제)

조순기(曺順基)

1917년 광양읍 호암 출신. 제3회(1977) 군민의 날에 모범적인 효부로 광양군민의 상 수상을 했음.

주씨(朱氏. 金容憲의 부인)

시아버지의 악성 항문종양(肛門腫瘍)때 입으로 빨아 치료하여 효부로 칭송이 자자했음.

주청대(朱靑垈. 이태구의 부인)

7년간 남편의 병이 위독하자 허벅지살을 베어 구어먹여 1981년 면민(面民)들이 효부비(孝婦碑)를 세웠음.

주씨(朱氏. 張運列의 부인)

25살 때 남편이 병들자 후원에 단을 쌓고 밤마다 기원하였으며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음.

최씨(崔氏. 宋澤洙의 부인)

남편이 위독할때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여 모성공회에서 비(碑)를 세웠음.

표씨(表氏. 金昌壹의 부인)

청상으로 종신수절하여「유형장문(有衡場文)」을 내렸음.

함덕희(咸德姬, 함상선의 딸)

16세에 출가 시어머니 간병에 효성을 다함. 대한노인회 표창 수상

허씨(許氏. 姜大圭의 부인)

남편이 학질로 3년동안 와병(臥病)하다 위독하자 허벅지살을 도려내어 피와 살을 먹여 병을 낫게 하였다. ‘모성공회’에서 시상(施賞)하고 열행비(烈行碑)를 세웠음.

허씨(許氏. 李軫鉉의 부인)

29살에 남편이 죽고 수절하며 시부모에게 효도하고 치산(治産)하여‘향교’에서 포상하고 보장문( 場文)을 내렸음. (증손, 이종우)

허씨(許氏)

골약동 성황 출신. 젊어서 남편을 사별하고 정절을 지키며 시부모에게 극진한 효도로 효열상을 받았으며 마을에 효열비가 세워졌음.

홍씨(洪氏. 서지원의 부인)

남편을 공경하고 시부모에게 효도하였으며 남편이 위독하자 손가락을 잘라 주혈하였고 가난하면서도 시아버지에게 매일 술과 고기로 효성을 다하였음.

황봉애(黃鳳愛. 鄭中和의 부인)

1930년 진상면 내금 출신. 시할아버지와 시아버지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고 효도하여 1958년 도지사(道知事)가 효부상(孝婦賞)을 내렸음. (자, 진상면 금이리정용문)
※ 참고문헌
1.『 광양군지』. 1983년12월30일
2.『 광양군지』. 1924년12월20일
3.『 광양향교지』. 1955년1월10일
4.『 내고장전통가꾸기』. 1981년12월30일
5.『 백운문화지』4호. 1988년3월21일
6.『 전남도지』2∙3∙30권. 1968년5월
7.『 국역증보문헌비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8.『 호남읍지』권9. 전남대학교구사교육과. 1871년
9. 이영빈.『 전국지리지총서』. 한국학문헌연구소. 1983년2월10일
10. 안종화.『 국조인물지』
11.『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
12. 이홍직.『 국사대사전』. 1999년6월10일
13.『 계간대동문화』(2001년광양통권)
14.『 독립유공자공훈록명단』(국가보훈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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