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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인물효자 (孝子. 현대인물 포함)

분류 : 조선시대의 인물

간략설명 : [조선시대의 인물] 효자 (孝子. 현대인물 포함)

효자 (孝子. 현대인물 포함)

강주일(姜周日)

진주 강씨로 호(號)는 학산(鶴山).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아버지가 죽게 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서 입에 넣어 수 일동안 연명케 했음. (희양지에 실려있음)

강대인(姜大仁)

진주 강씨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는데 어머니가 병이 들자 꿈에 신(神)의 계시로 영약을 얻어 그 병을 낫게 하였음. (희양지에 실려있음)

강위환(姜渭煥)

아버지가 죽게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서 입에 넣어 3일간 연명케하였음. (향당(鄕黨)에서 그 효성을 표창했음)

강재하(姜在夏)

자(字)는 성백(誠伯)으로 위환의 아들. 아버지가 병들자 배에서 피를 뽑아 먹였음.

권봉환(權鳳煥)

안동 권씨로 효성이 지극하며 아버지 임종때에 손가락 피를 입에 넣어 수일간 연명케 했음.

김시준(金時儁)

김해 김씨로 아버지가 병들자 신의 계시로 상기생(桑寄生. 뽕나무에 기생하는 겨우살이)을 캐어 시약(施藥), 100세에 이르도록 효성을 다했음.

김재룡(金載龍)

김해 김씨로 계모에게 효도하고 아버지가 병들자 신의 계시로 얼음속에서 고기를 얻어 달여드리는 등 약수발에 정성을 다하여 소생케했음.

김석현(金錫賢)

1833년 태인동 용지 출신. 김해 김씨로 나무를 해다 팔아 부모를 지극히 봉양하니 조정에서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들을 旌門을 세워표창하던 일)를 내리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의 증직을 줌(현손, 태인동 김재윤)

김낙구(金洛龜)

경주 김씨로 어릴 때부터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아버지가 위독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넣어 연명했음.

김시종(金時宗)

아버지가 병환으로 위독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넣어 7개월을 연명케 했으며 3년간 시묘(侍墓)하니 조정에서 정려(旌閭. 충신∙효자∙열녀 들을 그들이 살던 동네에 정문을 세워 표창함)를 세웠음.

김세수(金世洙)

어머니가 죽게되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3년간 연명케했음.

김재두(金在斗)

어머니 상(喪)중에 3년간 시묘(侍墓. 무덤옆에 막을 치고 지냄)했음.

김석홍(金錫洪)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하였으며 상(喪)중에는 3년간 조석으로 묘소(墓所)를 다녔음.

김정렬(金貞烈)

아버지 운명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절명을 구했음.

김인식(金麟植)

아버지 운명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었으며,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侍墓)했음.

김동석(金銅錫)

10년간 어머니를 정성으로 간병했으며, 운명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3일간 연명케 했음.

김영수(金榮秀)

광양읍 인동 출신. 16세 소년 당시에 부친이 병환으로 위독할 때 단지 주혈(斷指注血)로 소생케 함.

김정수(金正洙)

1912년 광양읍 동외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대한노인회 전남지부로부터 효자상을 수상하였음.

김정석(金貞錫)

1922년 진월면 아동마을 출신. 어려운 가정 형편속에서도 굳굳하게 자녀들을 키워냈으며 그 공으로 도지사 상을 수상하였음.

김종혁(金宗奕)

1779년 광양읍 용강리 검단 출신. 김령 김씨로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고 산에서 빌면서 눈물로 정성껏 약을 다려드렸으며 돌아가시자 3년간 무덤가에서 시묘(侍墓)했음. 1892년에 정려(旌閭)를 내렸음. 증 가선대부 호조참판

김치조(金致祚)

1700년경 광양읍 덕산 출신. 김해 김씨로 3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중 어머니도 병을 얻어 별세하니 무덤가에 초막을 치고 살다가 97살 때 죽으니,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세웠음.

김기평(金基平)

김해 김씨로 효자 김치조의 아들. 자는 윤일(允日), 호는 인강(仁岡).10년간 아버지의 시묘(侍墓)뒷바라지를 하다가 아버지보다 먼저 죽었음. 죽을 때 아들 효순(孝淳)에게 할아버지를 끝까지 봉양하도록 유언했음.

김효순(金孝淳)

자 영규(永圭), 호 서수(書修). 아버지 유언에 따라 할아버지에게 효성을 다했으며 상(喪)을 당하자 할아버지와 아버지 무덤가에서 시묘하다가 죽으니 세상에서 3세효(3世孝)라 불렀음.

김순근(金順根)

자는 병삼(丙三), 호는 송암(松菴). 김령 김씨로 아버지 상(喪)중에 3년간 시묘(侍墓)했으며 그후에도 성묘(省墓)에 지성을 다함으로 순조(純祖)때에 지능참봉(智陵參奉)을 받았음.

김의진(金宜鎭)

김해 김씨로 어머니가 죽자 3리 밖의 묘소에 조석으로 성묘(省墓)하였는데 백호가 호위수행 하였다고 전함.

김용택(金用宅)

1887년 광양읍 성북 출신. 김해 김씨로 아버지의 병환중에 배에서 피를 뽑아 먹였고, 어머니가 죽자 부모의 성묘에 정성을 다하여 모성공회(慕聖公會)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음.

김상영(金相永)

자는 치민(致珉). 호는 송산(松山). 어려서부터 할아버지 봉양에 지성을 다했으며 병이 들자 신의 계시로 깊은 산에서 약을 캐다가 드려서먹고 나았음. (손, 태인동 김재화)

김학기(金鶴棋)

김해 김씨로 어머니가 병들자 대소변을 받아내고 깊은 물에서 천어(川漁)를 구해 간호했으며 악종으로 신음하자 입으로 빨아 치유했음.

김현섭(金顯燮)

김해 김씨로 아버지 병환중에 어머니 상(喪)까지 당하여 성심으로 아버지 병구완을 하고 어머니 초상을 치르니 도(道)의 추천으로 관동가교관(官童家敎官)이 되었음.

김학섭(金鶴攝)

광양읍 무선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으며 서기 1856년에 증손 김윤규(金允珪)가 정려를 세웠음.

김상문(金相文)

호 송정(松汀). 김해 김씨로 가난하였으나 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음.(호남지에 실려있음)

김화(金樺)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도하여 엄동추위에 천어(川漁)를 구하여 공양하니 회생되었음.

김영태(金瑩泰)

아버지가 눈병을 얻자 부부가 똑같이 입으로 고름을 빨아 낫게 하였다. 사람들이 쌍효(雙孝)라고 하였음.

김윤행(金允行)

1877년 광양읍 본정 출신. 경주 김씨로 부모 생전이나 사후에까지 효도를 다하였다. 희양지에 등재되어있음(자, 광양읍 사곡리 김갑수(金甲壽))

김원태(金遠泰)

김해 김씨로 계모의 봉양을 생모와 같이 하고 근검치산(勤儉治産)했음.『(三綱錄』및『湖南誌』에기록되어있다)

김정태(金丁泰)

자 변일( 一). 김해 김씨로 효성이 지극했고 근검성가(勤儉成家)하여 가난한이웃을많이도왔음. 『(三綱錄』및『湖南誌』에기록되어있다)

김엽(金燁)

광양읍 덕산 출신. 효도가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환중일때 엄동에 천어(川漁)를 기천(祈天)으로 구하여 공양하므로 회생하였다 함. 광양군 향교 효 행상을 수상하였음.

나종길(羅鍾吉)

자 중경(重慶), 호 송은(松隱).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병든 아버지의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상(喪)을 당하자 애통함이 하늘에 닿았음. (자, 옥룡면 용곡리 경수)

문상례(文相禮)

1959년 진월면 장재 출신. 극진한 효행으로 사회규범이 되어 도지사표창수상(2003)

백치욱(白致旭)

효성이 지극함이 알려져 동가교관(童家敎官),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증직했음.

박문규(朴文圭)

함양 박씨로 아버지가 병들자 의원(醫員)말이 개구리라야 치유할수있다 하였으나 엄동이라 하늘에 기도하니 개구리를 구할 수 있게되어 병을 치유하였음.

박병기(朴炳基)

자 상언(相彦), 호 송호(松湖). 밀양 박씨로 홀어머니를 봉양하다가 어머니가 병이들자 손가락의 피를내어 입에 넣어 수일간 연명하였고 상(喪)중에는 3년간 금기했음.

박태운(朴泰運)

밀양 박씨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를 지성으로 봉양하였음. 상(喪)중에는 5리가 넘는 묘소에 3년동안 조석으로 성묘하였음.

박민구(朴珉求)

평소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 임종때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3일간 연명했음.

박준호(朴準琥)

1884년 광양읍 대실 출신. 밀양 박씨로 어머니 운명때 손가락 피를 내어 입에 넣어 3일간 연명했음. (손, 광양읍 죽림리 박노회)

박순필(朴順弼)

아버지 임종때에 손가락 피를 내어 입에 넣어 수일간 연명했음.

박동석(朴東碩)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아버지의 간병(看病)에 성심을 다하니 통정대부(通政大夫)를 증(贈)했음.

박인근(朴寅根)

자 명호(明浩), 호 세이당(洗耳堂). 순천 박씨로 아버지가 병이 중하자단을 쌓고 기원(祈願)하여 병이 나았음.

박영규(朴榮圭)

자 내선(乃善). 밀양 박씨로 아버지가 병이 들자 절에가 스님에게 영약(靈藥)을 얻어 치유했음. 고종19년에 정려를 세웠고 장릉참봉(章陵參奉)을 증(贈)했음.

박동석(朴東錫)

어머니가 병들자 깊은 산에 들어가 기원(祈願)하여 신약(神藥)을 얻어 낫게 하였음.

박영두(朴永斗)

어렸을때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어머니의 독종(毒腫)을 1년간 입으로 빨아 낫게 하였음. 향교의 표창이 있음

박민동(朴珉東)

승평 박씨로 어머니가 열병(熱病)을 앓자 하늘에 기원하여 봄철인데도 얼음을 얻어 간병하였고, 아버지의 임종때는 손가락의 피를내어 입에 넣었음.

박계영(朴啓英)

밀양 박씨로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정의가 두터워서 조카들까지 모두 거두어 기르고 혼인분가(婚姻分家)까지 도왔음.

박홍래(朴洪來)

밀양 박씨로 어머니가 병들자 신약(神藥)을 구하여 낫게 했음.

박준득(朴準得)

1856년 진월면 항동 출신. 밀양 박씨로 아버지의 간병에 정성을 다해 세칭 하늘에서 난 효자라고 하였음.

박만규(朴萬圭)

밀양 박씨로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를 봉양하는데 가난하여 어려움이 많았으나 온갖 희생을 무릅쓰고 공경을 다하였으므로 향민들의 모범이 되었음.

박병연(朴炳連)

밀양 박씨로 어머니가 중풍으로 거동을 못하게되자 10여년간 세끼의 밥을 떠먹여드리며 분뇨로 더러운 옷을 직접 빨고 밤에는 곁에서 자면서 간병을 하였음.

박소저(朴昭姐)

1957년 옥곡면 매동 출신. 효자효부 도지사 표창을 받았음.(2002)

서명팔(徐命八)

중마동 오류 출신.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애통한 예를 다했고 아버지상(喪)때는 3년간을 매일같이 호곡(呼哭)했음(8대손, 중동 서용규).

서준흠(徐俊欽)

중마동 오류 출신. 자 윤선(允善), 서명팔 의 현손(玄孫)으로 아버지의 상(喪)에 3년 동안 조석으로 제물을 올리고 시묘(侍墓)하였으니 향민들이 효성에 감동하였음.(4대손, 중동 서용규)

서형흠(徐馨欽)

1840년 옥룡면 흥룡 출신. 이천 서씨로 아버지 상(喪)을 당하여 3년동안 시묘(侍墓)하였는데 호랑이가 호위했다 함. 조정에서 정려(旌閭)를 세웠음.(3대손, 중동 서병섭)

서정준(徐廷駿)

중마동 오류 출신. 젊어서 할머니 상(喪)을 당하고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3일동안 연명하였으며 상중에는 일체 고기를 입에 대지 않았음.

서정건(徐正楗)

어머니 상 중에 3년간 시묘(侍墓)하였음.

서정옥(徐正玉)

자 경화(敬化), 호 송은(松隱). 이천 서씨로 그의 부인과 같이 마음을 합하여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다함으로 인근에서 부부쌍효(夫婦雙孝)라 칭했음.

서달철(徐達喆)

이천 서씨로 어머니가 병들자 까마귀를 잡아 그 쓸개로 병을 낫게 하였음.

서유검(徐有儉)

달성 서씨로 아버지가 병들자 엄한 추위에 뱀(黃蛇)을 드렸고 운명할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드렸으며 상중에는 3년간 시묘(侍墓)했음.

서정건(徐廷鍵)

자 경익(敬益), 호 호은(湖隱). 이천 서씨로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머니와 외가(外家), 그리고 집안어른들에게 두루 효행했음.

서한병(徐漢柄)

자 운종(雲宗), 호 운초(雲樵), 이천 서씨로 어머니가 병들자 8년간의 간병이 지극했음.(자, 옥룡면 운평리 서치식)

서종욱(徐鍾旭)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노친(老親)이 죽은 후에야 자녀를 낳았음.

서말식(徐末植)

이천 서씨로 어머니의 임종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7일간을 연명했음.(광양유림에서 표창함)

서효종(徐孝鍾)

1958년 옥곡면 매동 출신. 효자효부 도지사 표창을 받았음.(2003)

성동기(成東基)

강능 성씨로 7살때 어머니를 여의고 가난하여 땔나무를 팔아서 아버지를 봉양하였음. 상(喪)을 당하자 3년간 시묘(侍墓)했음. 모성공회의 찬양문이 있음.

성성수(成性守)

부모와 멀리 떨어져 있었으나 일정한날 부모를 어김없이 찾아뵈옵기를 30년간 지속하였고 아버지 상(喪)중에는 3년간을 새벽 성묘하였으니 군천(郡薦)으로 포상했음.

성동기(成東基)

7살 때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가 노병이 들자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지성으로 간병하였음. 90살 때 아버지가 죽자 3년간 시묘(侍墓)했음. 모성공회의 찬양문이 있음.

손재열(孫在烈)

밀양 손씨로 어머니 상(喪)을 당하여 6년간 시묘(侍墓)하여 마을에서 표창하였음.

손종수(孫鍾晬)

자 내견(乃見), 호 정암( 庵). 밀양 손씨로 경전사서(經傳史書)에 통했고 부모 상(喪)중 3년을 시묘하였음.

신홍구(申弘求)

고령 신씨로 어머니의 운명때에 자기의 배(服)에서 살을 떼어 구어서 드려 회생케 하였음.

신홍좌(申洪佐)

1821년 중마동 중촌 출신. 성품이 강직하고 인자하며 특히 어버이를 섬기는 정성이 지극하여 조선 고종 삼강록에 수록되어 전하며 마을에 효행비가 세워졌음.

신득모(申得模)

어머니의 운명때에 배에서 살을 떼어 구워드리고 그의 처(妻)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다 넣어드려 3일간 연명케했음.

심호택(沈浩澤)

청송 심씨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아버지가 병들자 대소변을 받아내고 정성을 다하여 약(藥)을 마련하여 드렸으며 운명때는 손가락피를 내어 입에 넣어드렸고 상(喪)중에는 항상 죄인으로 자처했음.

안태일(安泰馹)

1908년 진상면 삼정 출신. 아버지가 병들자 10년간을 지성으로 간병하였으니 상(喪)중에도 자식된 도리를 다하여 향리가 감동하고 사회규범이 되었음.(자, 진월면 진정리 춘식)

안진묵(安鎭默)

자 윤원(允源), 호 죽봉(竹奉). 순흥 안씨로 효성이 지극하여 고종조(1893)에 조정에서 정려를 내렸음. (증손, 진월면 차동 영준)

양복수(梁福洙)

1779년 진상면 목과 출신. 남원 양씨로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고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입에 넣어드렸고 또 배에서 살을 떼어 구워드렸음. 조정에서 가선대부 호조참판에 증하고 마을에 정려를 세웠음.

양병수(梁炳洙)

청주 양씨로 효성이 지극했고 가난한 이웃을 도와 덕을 쌓으니 고종조에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을 증(贈)했음.

양석현(楊錫賢)

1859년 옥곡면 대곡 출신. 고종조때 중추원의관(中樞院議官). 어머니가 학질로 신음하자 배에서 살을 떼어 구워드려 학질을 낫게 했음.(증손, 옥곡면 대곡마을 양상호)

양금순(梁今順)

1944년 옥곡면 묵방 출신. 효성이 지극하여 전남도지사상을 수상하였음.(자, 영완)

오진구(吳振龜)

아버지가 운명할 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 입에 넣어 3일간 연명했음.

오창욱(吳昌旭)

아버지가 운명할때 배에서 살을 떼어 구워드렸으며, 동생들은 손가락에서 피를 내어 입에 넣어드렸음.

오범순(吳範淳)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 피를 내어드려 3일간 연명하였는데 다시 위험하여지자 하늘에 기원하여 까마귀의 영약(靈藥)을 얻어 또 3일간 연명케했음.

오철상(吳喆相)

아버지가 병들자 단(壇)을 만들어 놓고 기원(祈願)하였으며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侍墓)하였음.

오두량(吳斗良)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에 피를내어 먹여 4년간 연명했음.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했음.

오상수(吳相洙)

어머니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여 회생케 했음. 향리의 표창이 있었음.

오지용(吳振龍)

보성 오씨로 아버지 운명때와 어머니 운명때 두번다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였고 상(喪)때는 범절을 제대로 지켜 행했음.

오복영(吳福泳)

아우 원영(元泳)과 함께 향리에 효행(孝行)과 의리(義理)를 중히 여기는 풍토를 조성함이 조정에 알려지자‘복영’에게는 통정동중추(通政同中樞)를, ‘원영’에게는 통정부호군(通政副護軍)을 제수하였고 89살때까지 청백과 충정으로 일관된 생활을 하였음.

우달홍(禹達弘)

광양읍 인서 출신. 아버지의 운명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여 연명케했고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하니 고종30년(1893) 조정에서 정려를내렸음. 세부사항은 마을유래지 인서마을『문화유산∙유적』을 참조

우병길(禹炳吉)

자 중지(重之), 호 죽파(竹坡). 1871년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원했고 운명때는 손가락의 피를내어 먹여 3일간 연명했고 상 중에는 3년간 시묘했음.

우우두(禹佑斗)

자 민오(敏五). 호 첨재(瞻齋). 일찍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가 병들자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소생케하고 상 중에는 3년간 시묘하고 아버지(우달홍)의 정려(旌閭)를 세웠음.

유삼수(兪三壽)

1914년 봉강면 하조 출신. 효행이 지극하여 제2회(1976) 광양군민의날에 군민의 상 수상

우순길(禹順吉)

어머니가 운명할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3일간 연명하였으며 같은 해에 또 아버지가 운명하자 역시 손가락 피를 내어먹여 14년간 연명케했음.

유동무(劉東茂)

문화 유씨로 가난하여 단신으로 땔나무를 팔아 늙은 아버지를 봉양하였으며 90살때 죽으니 3년간 시묘했음.

유정열(劉丁烈)

강눙 유씨로 가난하여 품삯으로 아버지의 병을 고쳤으며 어머니가 운명할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수일간 연명했음.

유학준(兪學濬)

자 내섭(乃涉). 아버지가 우연히 눈이 멀자 온갖 지성으로 간호하여 다시 눈을 뜨게 했음.

유계양(柳季養)

옥곡면 곡동 출신. 자 춘언(春彦). 호 덕봉(德峯).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회생케 했음. 조정에서 정려를 내리고 동몽교관(童蒙敎官)을 내렸으며 1929년에 마을입구에 정려가 세워졌음. (옥곡면 장동리 곡동)

윤성실(尹成實)

집이 가난하였으나 효성을 다하였음. 형제간에 상의하여 형(兄)은 가계를 일으키고 동생인‘성실’은 부모봉양을 분담하여 모범이 되니 고종조에 포상하였음.

윤희복(尹喜復)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했으며 사숙(私塾)을 세워 후진을 가르쳐 인재를 기르니 고종조에 포상하였음.

윤식성(尹埴成)

아버지가 운명할 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수일간 연명했다. ‘광양향교 상’을 받았다.

이강학(李康學∙東喆)

1922년 광양읍 대실 출신. 어머니 병환위급시 단지주혈로 소생케 하였으며 사후에도 3년간 지극정성으로 장례를 치러 마을주민들이 감동하였으며 향천의 추천으로 효자상을 수상

이종구(李鍾求)

자 대진(大振). 어머니가 병들어 뱀이 좋다는 의원(醫員)말을 들었으나 엄동(嚴冬)이라 구할 길이 없었음. 깊은 산에 기도하여 뱀을 얻어병을 나았음.

이서찬(李瑞璨)

영천 이씨로 아버지가 수년동안 병환으로 있었으나 지성으로 간호했고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했음.

이수계(李秀季)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했으며 아버지 운명때에 손가락 피를 내어먹여 3일간 연명했음.

이홍순(李弘純)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 피를 내어먹여 연명했고 상 중에는 3년간 시묘했음.

이영수(李榮秀)

아버지가 병들자 14살때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회생시켰음. (광양읍 인동리 진흥회 표창)

이재수(李在洙)

노모(老母)가 중풍(中風)으로 있을때 정성으로 간병하고 상(喪)중에는 매일 새벽 성묘(省墓)했음.

이명우(李明宇)

자 영백(英伯). 편모를 모시면서 효성이 지극했고 운명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이므로 수일간 연명했음.

이진순(李瑨淳)

자 영지(永芝). 완산 이씨로 부모상(父母喪)중에 3년간 시묘(侍墓)했음.

이재륜(李在崙)

자 내옥(乃玉). 전주 이씨로 아버지가 오고 가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하천(河川)에 징검다리를 놓았는데 세칭 효자다리라고 했음.

이신오(李臣吾)

부모의 운명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수일간 연명했음.

이득하(李得厦)

신오(臣吾)의 조카로 부모가 병중에 있을때 약(藥)이나 죽(粥)을 손수다렸고 자기는 물론 처(妻)도 함께 손가락의 피를 내어먹여 수일간 연명케 했음.

이덕진(李德辰)

1956년 진월면 외망 출신. 부모에 대한 효가 극진하여 사회규범이되어 도시자 표창을 수상하였음.(2001)

이적수(李寂秀)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원하여 자라를 구하여 병을 낫게 하였고 임종때는 손가락 피를 내어 먹였으며 어머니가 병들자 눈물로 하늘에 기원하여 때아닌 앵두를 얻어 병을 낫게 하였음.

이근구(李根求)

자 덕회(德晦), 조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했고 조부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했음.

이세갑(李世甲)

완산 이씨로 어머니가 병들자 단을 만들어 기원(祈願) 했고 운명때는손가락 피를 내어 먹였으며 배(服)의 살을 떼어내 구어서 드렸음.

이회인(李會寅)

자 중섭(仲燮). 완산 이씨로 신오(臣吾)의 후손. 효도가 지극하니 내려오는 가훈에 따르는 후손이란 칭송이 자자했음.

이득경(李得慶)

자 응측(應則). 완산 이씨로 부모상(父母喪)중에 3년간 시묘(侍墓)했음.

이기문(李起文)

아버지가병들자배에서살을떼어구어드렸고, 손가락의피를내어먹였음

이승균(李昇均)

부모의 임종때 두분에게 다 각각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였으며 할머니상(喪)중에 소식(素食)으로 애도(哀悼)했음.

이호인(李好仁)

전주 이씨로 노모의 중풍에 단을 만들어 기원(祈願)했고 대∙소변을 받아내며 배설한 옷을 스스로 빨래했음.

이일구(李馹求)

자 계진(桂振). 아버지가 운명할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연명케 했음.

이상득(李尙得)

광양읍 강정 출신. 15세의 어린나이로 어머니가 운명하려 하자 세차례나 단지주혈하였음. 광양읍 용강리에 정려가 세워짐.

이수영(李壽永)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원하고 약을 드렸으며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하니 교관(敎官)을 증(贈)했음.

이정의(李廷儀)

편모가 7년동안 중풍으로 있을 때 대소변을 받아내며 간병과 봉양이 지극했음. (대한노인회 표창)

이준모(李準模)

호 우재(愚齋). 효성이 지극해서 1973년 성균관장 표창 수상

이형석(李炯晳)

전주 이씨로 효성이 지극해서 1965년 전라남도 도지사 표창 수상

이영수(李榮秀)

아버지의 병이 위독하자 16살된 소년으로 손가락 피를 내어먹여 회생케하였음. 광양군‘효행상’을 받았음. (인동리)

이은종(李殷鍾)

1864년 광양읍 내우 출신. 어려서 부모님께 효성이 지극하여 가세가 빈곤함에도 멀리서 식량과 찬을 구하여 지성으로 봉양하면서도 적선을 하는데 인색하지 않고 부모가 위독하자 단지관구(斷指灌口)하여수일을 연명케 함. 조정에서 정려가 내려짐.

이보원(李輔元)

전주 이씨로 10년간 병든 부모를 부부간에 정성을 다하여 쌍효(雙孝)로 간병하고 봉양했음. (태인리)

이경수(李京水)

경주 이씨로 10년간 병중에 있는 부모에게 정성껏 간병, 효도했음.(자, 진월면 오사리 숙동(淑東))

장계현(張季炫)

광양읍 인동 출신. 부친위급시 단지주혈로 3일간 연명케하였고 3년동안 불을 켜고 시묘를 하여 1925년에 성모공회로부터 찬양문을 받음.

장재동(張在錬. 장개현의 아들)

광양읍 인동 출신. 어머니가 위급시 단지주혈로 1일간 연명케 하였고 3년동안 시묘를 하여 1925년에 성모공회로부터 찬양문을 받았음.

장준석(張駿錫)

어머니가 병들자 하늘에 기원하여 때아닌 고기를 얻어 치유했고 임종때는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회생케했음.

장시열(張시烈)

옥룡면 율천리 출신. 호 율은(栗隱). 효성이 지극하여 아버지가 병들자 하늘에 기원하여 회생케했음. 향리에서 표창 받았음. (옥룡면 율천리)

장우상(張羽相)

아버지와 어머니가 병들었을 때 형제들이 각각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이니 세칭 3효(3孝)라 했음.

장기화(張基華)

옥룡면 율곡 출신. 평소 모친에 대한 효성이 극진하였는데, 모친이 중병에 걸려 신음하게 되자 단지주혈(斷指注血)하였으며, 또한 부친이 위독하게 되니 그 아우인 기룡(基龍)이가 작지주혈(斫指注血)하여 병을 낫게 하였으므로 세칭 일문쌍효(一門雙孝)라 하였음.

장석우(張錫羽)

아버지 운명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회생케하고 상(喪)중에는 3년간 시묘(侍墓)해서 순조조(純祖朝)에 관동가교관(官童家敎官)이 되었음.

장계원(張季遠)

아버지가 병들자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여 회생케하고 상중에는 3년간 시묘(侍墓)하여 고종조에 관동가교관(官童家敎官)이 되었음.

장익양(張益陽)

자이화(而華), 호옥강(玉岡). 효성이지극하고벗을좋아했음. 『(倫綱錄』에 기록됨)

장한종(張翰種)

1922년 옥룡면 율곡 출신. 양친이 위독할 때 손가락피를 내어 먹여 수 일간 회생시켰음. 종내상(宗內賞)∙노인당상∙새마을지도자 동지회 상∙향교상을 받았으며 지극한 효행으로 사회규범이 되어 2003년 광 양시민의 상 수상.

정윤화(鄭潤和)

아버지의 운명 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3일간 연명케 하였음.

정동선(鄭東善)

부모님 운명 때 각각 3차례나 손가락 피를 내어 먹였음.

정순석(鄭淳錫)

진주 정씨로 아버지 운명 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소생케 했음.

정운세(鄭運世)

효성이 지극했으며 상(喪)중에는 3년간 새벽성묘를 했음.

정인주(鄭仁周)

동래 정씨로 어머니 운명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소생케 했음.

정치재(鄭致載)

자 내현(乃賢). 진주 정씨로 아버지가 중병을 앓자 하늘에 기원계시(祈願啓示)를 받아 계곡에서 약초를 구해 낫게 하였음. 그 약초를 효삼(孝蔘)이라 했고 정려(旌閭)를 세웠음.

정대유(鄭大有)

진주 정씨로 임란(壬亂)때 아버지를 가야산(伽倻山)으로 피난시켜 편히 봉양하였으므로 호조정낭(戶曹正郞)을 추서받았음.

정만하(鄭萬夏)

광산 김씨로 아버지의 노환(老患) 때 여름에는 메추리알로, 봄에는 송이(松茸)버섯으로 보양, 치유했고 운명 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였고 상 중에는 3년간 시묘했음

정택구(鄭澤龜)

아버지의 운명 때는 손가락의 피를 내어 먹였고 어머니의 병환(病患)때는 배의 살을 떼어 구어서 드렸음. 조정에서 상을 내렸음.

정주국(鄭柱國)

자 여직(汝直). 호 연와(蓮窩).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여 포상을 받음. 『(倫綱錄』에기록됨)

정운우(鄭運佑)

자 성홍(性洪). 진주 정씨로 아버지가 병들어 위독하자 술을 끊고 간병했으며 상 중에 3년간 성묘했음.

정문옥(鄭文玉)

아버지의 중풍(中風)으로 12년 동안에 대∙소변을 받아내고 손수 빨래하며 간병하여 장수케했음. (대한노인회 표창)

정상호(鄭尙浩)

1910년 진상면 내금 출신. 진주 정씨로 아버지 운명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광양향교 효부상’을 받았음.

조정용(趙廷龍)

9순(九旬)의 어머니를 모시면서 효성이 지극하고 간병에 극진했음.

조성인(趙性麟)

아버지가 병들자 주야로 하늘에 기원하여 산삼을 얻어 치유했고 어머니의 운명때는 처가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회생시켰음. 통정(通政)을증(贈)하고 정려(旌閭)를 세웠음.

차원삼(車源三)

1944년 진상면 지랑 출신. 지극한 효행으로 사회규범이 되어 국무총리상을 수상하였음.(1987)

차순언(車順彦)

호 송암(松岩). 연안 차씨로 아버지가 13년간 중풍으로 있을때 지성으로 간호했으며 상중에는 3년간 시묘(侍墓)했음.

최한정(崔漢精)

자 치명(致明). 호 운파(雲坡). 경주 최씨로 아버지가 병으로 위독하자 두번이나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한달을 연명했음.

최종림(崔宗林)

1854년 광양읍 신기 출신. 부친이 위급한 병환일 때 단지주혈하여 소생시켰으며, 부친이 돌아가신 후 3년간 시묘살이를 하는 등 효부로 널리 알려져 모성공회의 찬양문을 받았음.

최창호(崔昌昊)

전주 최씨로 10여년간 병든 어머니에게 정성으로 간병해서‘모성공회(慕聖公會) 상’을 받았음. (망덕리)

추재규(秋在圭)

자 서칠(序七), 호 용계(龍溪). 아버지 병이 위독하여 단(壇)을 만들어 하늘에 기원했더니 신약(神藥)을 얻어 쾌유했음.

탁경순(卓景順)

1907년 골약동 중양 출신. 7살때 아버지를 여의고 편모(偏母)를 모시면서 효성이 지극하니 세인이 감복했음.

하상천(河相天)

1939년 진상면 섬거 출신. 어려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에게 보양과 효도를 다하였음. 1983년‘전남 도지사상’을 받았음.

하응국(河應國)

계유에 사마가 됐는데 효우로 특수능성(特授綾城) 현령함.

허호(許壕)

자 급지(及之). 김해 허씨로 조부모를 극진히 봉양했으며 두분의 상중에 6년간의 시묘생활을 했음.

허장수(許長壽)

3살때 어머니가 위독하자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6일간 연명케하여 관찰사의 표창을 받았음.

허만성(許萬成)

1926년 봉강면 저곡 출신. 효성이 지극하여‘전남도지사 상’을 받았음.

한용(韓龍)

14살 때 가출한 아버지를 찾고자 22살 때 까지 방방곡곡을 수소문해 묘향산(妙香山) 보현사(普賢寺)에서 유골을 찾아 광양에 안장했음.

함동기(咸東基)

옥룡 중산 출신. 생후 7개월만에 어머니를 여의고 홀아버지의 품에서 어렵게 자라났음. 아버지가 노병을 앓자 곁을 지키며 간병에 정성을 다하였고 상(喪) 중에는 옥룡면 추산리 금목산중에서 3년간 시묘했음. ‘모성공회’에서 찬양문을 내려 효행을 치하하였음.

황응모(黃應模)

진상면 비촌 출신. 어머니 운명 때 손가락 피를 내어 먹여 연명했음.(증손, 진상면 비평리 호연)

황학천(黃鶴天)

진상면 비촌 출신. 양모(養母)가 18년간 중풍으로 고생할때 지성으로 간병했음. 향천이 있었음.

황하석(黃夏錫)

1799년 진상면 비촌 출신. 호는 운고(雲皐).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여 조정의 명에 의거 정려를 받음. 정려비는 현재 황죽리 죽림마을에 위치함. 한편 흉년에 가난한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주는 등 선행을 베풀어 적선비(積善碑)가 세워졌었음.

황영표(黃永杓)

장수 황씨로 부모에게 효성이 지극하고 경로정신이 투철하며 형제간에 화목하여‘대통령 상’을 받았음. (옥룡면 운평리)
※ 참고문헌
1.『 광양군지』. 1983년12월30일
2.『 광양군지』. 1924년12월20일
3.『 광양향교지』. 1955년1월10일
4.『 내고장전통가꾸기』. 1981년12월30일
5.『 백운문화지』4호. 1988년3월21일
6.『 전남도지』2∙3∙30권. 1968년5월
7.『 국역증보문헌비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8.『 호남읍지』권9. 전남대학교구사교육과. 1871년
9. 이영빈.『 전국지리지총서』. 한국학문헌연구소. 1983년2월10일
10. 안종화.『 국조인물지』
11.『 조선환여승람(朝鮮 輿勝覽)』
12. 이홍직.『 국사대사전』. 1999년6월10일
13.『 계간대동문화』(2001년광양통권)
14.『 독립유공자공훈록명단』(국가보훈처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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