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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고려시대 인물김황원 (金黃元)

분류 : 신라와 고려시대 인물

간략설명 : 김황원 (金黃元) 1) 출생과 사망(1045 ~ 1117) 김황원(金黃元)은 1045년(고려10대 정종11년)에 광양읍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났고, 1117년(16대 예종12년)에 72세로 사망하였으며 자(字) 는 천민(天民)이다. 2) 과거 합격과 벼슬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여 좌습유(左拾遺. 문하부의 낭사(낭舍) 벼슬. 正6 품), 지제고(知制誥. 고려때

김황원 (金黃元)

1) 출생과 사망(1045 ~ 1117)

김황원(金黃元)은 1045년(고려10대 정종11년)에 광양읍 봉강면 석사리에서 태어났고, 1117년(16대 예종12년)에 72세로 사망하였으며 자(字) 는 천민(天民)이다.

2) 과거 합격과 벼슬

일찍이 과거에 합격하여 좌습유(左拾遺. 문하부의 낭사(낭舍) 벼슬. 正6 품), 지제고(知制誥. 고려때 왕에게 조서(詔書)∙교서(敎書) 등을 지어 바치던 벼슬. 內知制誥∙外知制誥가 있었음) 에 기용되었고, 이어 경산부사 (京山府使. 지금의 星州)가 되어 백성들을 위하여 많은 치적을 쌓았으며, 그 후에 예부시랑(禮部侍郞. 의례(儀禮)를 맡아보던 차관(次官)), 국자제 주(國子祭酒. 나라에서 제사 지낼때에 쓰는 술을 담당하는 관리), 한림학사 (翰林學士),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 正3품)를 역임하고 난 후에 여러 번 표문(表文)을 올려 은퇴하기를 청하여 관직에서 물러났다.
예종(睿宗)때 중서사인(中書舍人)이되어 요(堯)나라에 사신으로 가는길에 북부(北部)지방에 대기근(大饑饉)이 있어 백성들이 참혹하게 굶주리는 것을 보고 역마(驛馬)를 달려 상서하여 군(郡)과 주(州)의 창곡(倉穀)을 내어 진휼(賑恤)할 것을 청하니 왕(王)이 그 말을 쫓았다. 돌아오는 길에 백성들이 보고 말하기를“이 분이 우리를 살린 상공(相公)이다”라고 하였 다. 그 후에 여진(旅眞)이 요(堯)를 침략하여 동쪽 변방 모든 성을 항복 받 았으나 내원(內遠)∙포주(抱州) 두성이 굳게 지켜 항복하지 않고 버티었 으나 성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비싼 값으로 곡식을 사기를 청했으나 변방 (邊方)의 관리들이 서로 매매를 금지하는 일이 생겼다. 이때 황원(黃元)이 상소하기를“남의 재앙을 다행이 여김은 인(仁)이 아니며 이웃을 성내게 함은 의(義)가 아니니 청컨대 두성에 곡식을 팔고 또한 무역하기를 허락하 소서”라고 하였으나 왕(王)이 회보(回報)하지 않았다.

3) 김황원의 학문과 문학

김황원은 고문(古文)을 지어 해동제일(海東第一) 이라고 이름이 났으며, 성품이 깨끗하고 굳세어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다. 그는 영달을 하려고 남의 말이나 본뜨며, 행세 차로 짓는 시(詩)는 구역질이 난다고 말하여 문학(文 學)의 순수성을 주장하므로서 문학이 출세와 영달을 위한 수단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당시 유행하는 문체(文體)를 따르지 않고 고문체 (古文體)로 글을 지으므로 재상(宰相)이던 이자위(李子威)가 임금에게 말 해 한때 파직까지 당하였는데 상서(尙書) 김상우(金尙佑)가 6대 선종(宣 宗)에게 다시 말 하여 뽑아 올려‘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 벼슬을 내 렸었다. 임금이 책을 읽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으면 언제나 황원을 불러 물 었고 그는 막힘없이 대답하여 신임이 두터웠다.
그러나 그의 깨끗하고 곧은 성격과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때문에 관 직생활이 평탄하지는 못하였다 한다. 그가 한림원(翰林院)에 있을때 이궤 (李軌)와 더불어 문장(文章)으로 이름이 높았는데 한번은 요(遙) 나라에서 사신(使臣)이 왔는데 그를 환영하는 궁궐의 잔치에서“봉함륜발종천강(鳳 含綸從天降) 오가봉래도해래(鼇駕蓬萊渡海來). 봉황이 윤발(綸. 皇帝 의 조서)을 물고 하늘에서 내려오고, 자라는 봉래(蓬萊. 송(松)∙죽(竹)∙ 매(梅)∙학(鶴)∙거북 같은 것을 만들어 보기 좋게 장식해서 축하식에 쓰 는 물건) 를 타고 바다를 건너 왔네”란 시를 즉석에서 지어 불렀다. 이에 사신들이 놀라고 탄복하여 그 시를 적어 가서 중국에까지 널리 알려졌었다.
김황원의 글중에서 유명한 것은 평양(平壤) 부벽루(浮碧樓)에 올라가 쓴 글귀이다. 그가 부벽루에 올라 고금(古今)의 현판(懸板)에 글을 읽어보니 모두 뜻에 차지않아 그 현판들을 뜯어 불사르고 온종일 난간에 의지하여 시(詩)를 지으려고 애쓰다가 오직 다음의 한 구를 짓고 더이상 시상(詩想) 이 떠오르지 않아 통곡하였다는 말이 전해진다.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 긴 성 넓은 강에 물결이 넘실 거리고, 넓은들 동쪽 끝에 점점한 산들”이시 는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로서 너무나도 유명한 시이다. 예 종조(睿宗朝)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있을 때 흉년이 들어 인상식(人相 食)하는 참상을 보고 상소를 하여 주군창고의 비축미(의창)를 풀어 구휼 (救恤)에 힘써 백성을 사지에서 구한 바 있음. 그후 국자제주(國子祭酒)∙ 한림학사(翰林學士)∙첨서추밀원서(簽書樞密院書)를 역임하다가 퇴직, 72세 일기로 별세하자 왕이 문간공(文簡公)이란 시호를 하사하였다. 그의 아들은 통리(通理)∙존도(存道)∙통문(通文) 의 세 명이 있었다.
※ 참고문헌
1.『 고려사』
2. 羅恪淳『. 고려사절요』
3. 태성규『. 신동국여지승람』
4.『 대동야승』
5. 朴玉杰『. 동사강목』
6.『 태조실록』
7.『 한국철학연구』. 한국철학연구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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