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관광양시의 지정문화재
분류 : 개관
간략설명 : 광양시의 지정문화재 1) 지정문화재 현황 2002. 12. 31현재 구분 종별 문화재명 소재지 지정일자 비고 국가지정(6) 보물 제112호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 광양시 옥룡면 중흥로 263-100 1963. 1. 21 사적 제407호 광양 옥룡사지 광양시 옥룡면 추산리 산 35-1번지 외 21 1998. 8. 3 사적 제492호 광양 마로산성 광양
1. 지정문화재 현황[2002. 12. 31현재]

2. 지정문화재별 설명1
(1) 중흥산성 삼층석탑(中興山城三層石塔)

중흥산성은 백운산의 한 지맥이 남서쪽으로 내려와 옥룡면에 닿은 곳인데 이곳 산중턱에 중흥사라는 사찰이 있다.이 석탑은 사찰내에 있는데 원래는 석탑과 함께 쌍사자석등이 있었으나 석등(국보 제103호)은 서울로 옮겨졌다가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있다.
이 중 기단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은 신라의 석탑양식을 그대로 따랐고 지대석 위 상면에 몰딩이 있어 하층기단 하대석을 받게 되는 특수양식을 가지고 있다. 하대석과 중석은 일석으로 붙여 4매 장석으로 구성하였는데 중석 각 면에 우주(隅柱)와 탱주( 柱) 삼주(三柱)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다. 갑석은 매우 두껍고 상면에 약간의 경사가 있어 우동(隅棟)이 뚜렷하며 중앙에 각형과 호형의 몰딩이 있다.
상층기단 중석(上層基壇中石)에는 우주가 표시되고 탱주 일주로서 2구로 구분한 다음 전면에는 인왕상(仁王像) 2구, 양측에는 사천왕입상(四天王立像), 후면에는 보살상(菩薩像) 2구가 양각(陽刻)되었는데 자세히 보면 이들 조상의 배치에도 유의한 듯 하다. 갑석(甲石)면에는 각각 우각에 2공과 중앙에 3공이 있어 이곳에는 당초 다른 부착물이 있었던 것 같다. 밑에는 부연이 달리고 상면 경사에 각형 2단의 몰딩이 있어 탑신을 받았다. 탑신부는 옥신과 옥개석이 각각 한돌(一石)로 초층옥신(初層屋身)에는 네귀퉁이에 굵직한 우주가 있고 각면에는 앙련복련(仰蓮伏蓮)의 연화좌(蓮華坐) 위에 결가부좌(結跏趺坐)한 여래상이 1구씩 있어 사방불(四方彿)을 이루었다. 2층 이상의 옥신은 체감되었고 4우주만이 모각되었다.
옥개석 받침은 각층 3단이고 추녀밑은 수평이다. 옥상에는 우동이 뻗어 전각에 이르러 반전이 보이고 전각 단면에는 풍령공(風鈴孔)이 있으며 옥정에는 탑신받침 1단이 마련되었다. 상륜부에는 노반만을 남기고 그 위에 구형 석제가 얹혀 있다.
이 탑은 양질의 화강암을 택했음인지 보유상태가 매우 양호하며 탑신의 4불을 조각하고 그 밑에 인왕, 사천왕, 보살 등 권속(眷屬)을 질서있게 배치한 것을 보면 상당한 배려가 짐작된다. 이 석탑의 조성은 신라말기에 해당될 것이나 당시 이와 같은 우수작이 나왔음은 매우 주목된다고 하겠다.
(2) 광양 유당공원의 이팝나무(光陽柳塘公園의 이팝나무)

- 나무의 크기
높이 17m, 흉고 3.1m로서 나무 높이 2.5m높이에서 2개로 갈라졌으며 밑부분의 둘레는 각각 2.3m와 2m이다. 나무 크기는우리나라에서 자라는 이팝나무 중 4번째이지만 싱싱한 모습과균형잡힌 부분에 있어서는 첫 번째로 꼽힌다.
- 유 래
유당공원은 조선시대에 광양읍성을 쌓고 멀리 바다에서 보이지 않도록나무를 심었던 곳이다. 성은 없어졌으나 나무만은 남아있다. 팽나무, 느티나무, 이팝나무가 남아있다. 이 지역은 우리나라에 있어서 태풍의 상륙지이므로 때로는 풍수 피해가 심하였다. 1925년, 1933년, 특히 1936년에는 초속 32m의 기록이 있어 바람의 피해가 컸었다. 따라서 군사목적으로 심은나무가 방풍림의 역할을 하였으므로 잘 보호되어 왔으나 지금은 몇 그루만남아 있을 뿐이며, 수령은 광양읍성 이후에 심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3) 장도장∙패도(粧刀匠∙佩刀)

패도는 사대부와 부녀자들이 생활용과 호신용으로 패용했던 길이 10~20cm 가량의 작은 칼을 말한다. 선비들은자신의 충절을 이 패도로 지켰고, 부녀자들은 유사시에 자신의 정절을 지키려는 상징으로 패용해 왔는데 후대에 와서는 하나의 장식용으로도 활용되었기 때문에 장도라고도 불리어지게 된 것이다.
광양이 패도의 본고장이 된 것은 고려초부터 전란이나 사화를 피해 이곳에 피신해 온 선비들이 자신의 충절을 표시하기 위해 이를 손수 만들어 패용했고 자손들에게 그 기술을 익히게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녀자들은 어지러운 전란이나 외세를 당했을 때 자신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가슴 속 깊이 간직한 패도로 자결한 예가『동국신속삼강행실』등에서 볼 수 있다.패도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칼자루나 칼집의 모양에 따라 다르다. 부인용은 작고 일반용은 크며 또 장식재료의 종류에 따라 그 이름도 다르게 호칭된다. 그 대표적인 것들로는「첨사도」「팔모도」「네모도」「가진乙字刀」「을자도」「을자맞배기」「평맞배기」「금장도」「사각은장도」등이 있다. 또칼집에 부착할 장식품은 금은백동 등의 재료를 녹인 다음 망치로 두들겨서납작하게 만든다. 이렇게 하여 장식품이 다듬어지면 여기에 문양화한 국화,여치, 메뚜기 등 우리의 전통적인 무늬를 접착시킨다.
기능보유자인 박용기씨는 14세 때부터 이미 고인이 된 광양의 유명한 패도장인 장익성씨에게서 그 기능을 전수 받아 오늘에 이르고 있고, 또 외아들인 종군에게 자기의 평생동안 익힌 기능을 전수시키고 있다.
(4) 광양 옥룡사지 일원(光陽玉龍寺址一圓)

옥룡사지는 광양 백운산(해발 1,218m)의 지맥인 백계산(해발 505m)에 자리하는데 8세기초인 통일신라때에 중수된 것으로 전하는 사찰로, 우리나라 불교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道詵, 827~898)이 35년간(864~898)머물면서 수백 명의 제자를 양성하다 입적한 유서깊은 유적지다. 순천대학교박물관에서 실시한 지표조사(1994년) 및 4차례 발굴조사(1997~2001)결과, 도선국사와 통진대사의 부도전지 및 비전지 등 건물지, 명문비편 90여 점이 확인됨은 물론, 도선국사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과 유골을 안장한 것으로 보이는 석관이 발견되어 당시의 고승들의 장례풍습을 알 수 있게 해준 중요한 유적이다. 또한 도선국사가 땅의 기운을 북돋우기 위해 심었다는 7천여 그루에 이르는 동백나무가 절터를 중심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어 빼어난 풍경을 보여주고 있다.
구전에 의하면 도선국사가 연못에 살고 있던 9마리 용을 몰아내고(백룡이 심하게 항거하였으나 지팡이로 눈을 멀게 하고 연못의 물을 끓게 하여몰아냄)숯으로 연못을 메꾸어 옥룡사를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다.「 동문선(東文選)」에 실린 도선국사 비음기에“도선국사가 옥룡사라는 조그마한절에 와서 보니 주변 풍경이 그윽하고 좋아서 평생을 머물기로 작정하고옥룡사를 고쳐서 거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아울러, 옥룡사 주변의 땅기운을 북돋고 보완하기 위하여 윤기가 흐르고 사철 푸른 나무인 동백림을조성하였으며, 차밭을 일구어서 참선수행에 정진하는 제자들이 심신수련을 위해 복용토록 한 것으로 전하기도 한다.
옥룡사는 8세기초 창건되어 도선, 경보, 지문스님 등에 의해 법맥이 이어져 오다 조선후기인 1878년 화재로 소실폐사되었고, 비석거리로 불리던탑비전지에 세워졌던 도선국사와 수제자 통진대사의 부도탑과 비석도1920년을 전후하여 파손되었다.
1994년에는 정밀지표조사를 실시하였고 1997년(탑비전지)과 1998년(건물지)에는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다. 발굴결과는 도선국사와 통진대사부도전지 및 통진대사 비전지 확인, 명문비편 90여 점을 확인하였고, 출토유물은 석관과 유골(도선국사 부도전지), 명문와편과 다량의 자기류(고려청자, 조선전기 백자), 용문 암키와, 연화문과 당초문이 시문된 벽돌 등이다. 절터의 퇴적층은 1~2m에 달하고 있어, 통일신라말, 고려전기∙후기,조선전기∙후기 순으로 뚜렷하게 구분되고 있다. 현 절터에는 1969년에건립한 대웅전 1동과 관리인 주택이 있다. 절터 주변의 동백림은 약 7천여그루에 달하여, 수령은 300~500년, 흉고둘레 20cm~2m, 수고 3m~6m이고, 절터 좌우측 능선 끝자락에 야생차밭이 있으나, 칡넝쿨 등 잡목과 혼재되어 있다.
1974년 9월 24일“광양백계산동백림”을 전라남도기념물 제12호, 1997년 7월“옥룡사지”를 전라남도기념물 제166호로 지정하였다가 두 구역을포함하여 사적지로 승격하였다.
옥룡사는 도선국사가 35년이나 주석하였고 후백제와 고려전기에 활동하였던 통진대사가 주석하였던 고찰이다. 20세기 초반까지 도선과 통진의 쌍비와 쌍탑(부도)이 유존해 있었으며 쌍비의 탁본과 내용이 전해지고 있어당시 불교계와 사회상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발굴조사를 통해 절터의 퇴적층이 170㎝정도 되어 최소한 6개 층의 문화층이 확인되었고 도선과 통진의 부도전도 확인되었다. 또한 도선국사 부도전 중앙에는 석관이 안치되어 있고 그 안에 도선국사 유골로 추정되는 인골이 안치되어 있어 당시 선사들의 장법을 이해하는데 커다란 자료를 획득하였다. 또한 동백림이울타리처럼 절터 전체를 감싸고 있어 경관도 뛰어나다.
(5) 광양 성황리 삼층석탑(光陽城隍里三層石塔)

이 석탑은 야산 평지에 위치한 3층 석탑으로 일반형에 속한다. 지대석과 하층기단 중석을 각각 따로 만들어 4매 판석으로 짜고 4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중앙에 탱주가 있는데 상면으로 상층기부를 받기 위한 몰딩을 생략해버린 것이 특이하다. 상층 기단부 역시 순박한 4매 판석으로 결구하였으며, 각 면에 모서리 기둥과 중앙에 희미한 탱주를 모각하였고, 다른 조출이 없다.기단부 갑석은 두꺼운 편이며 조각수법이 세련되지 않아 평박하게 보이는 한편 하면은 부연이 퇴화된 채 수평을 이루고 있다. 상면은 상당한 경사를 주어 초층 몸체 부분의 중앙쪽에 이르러서는 가벼운 몰딩을 표출 몸체를 받고 있다.
몸체부는 지붕돌과 지붕을 각 1석씩으로 하였고, 각층 몸체에는 모서리기둥을 새겼다. 이층 지붕돌부터는 체멸되어 균형을 잃지 않았으며, 지붕받침은 각층 3단이나 지극히 형식화되었다. 물 흐르는 면은 비교적 경쾌한곡선을 보이다가 전각에 이르러 가벼운 반전을 나타냈다. 상륜부는 노반이있고 그 위로 복발 보주를 얹어 놓았다.
이 석탑은 이중 기단의 통식을 따랐으나 조법이 섬세하지 못하며 일부 양식에서 퇴화된 점 등을 참고하면 고려 후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이곳에 석탑이 있는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부터 사찰이 경영된 것이 분명한데 이 절터에 대한 아무런 문헌이 없어 그 내용을 알 길이 없으며 한때기단부가 파손되었으나 1976년과 1997년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 광양 향교(光陽鄕校)

광양 향교는 태조 6년(1397) 창건한 것으로 전하고 있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뒤에 임진왜란의 병화로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으며 광해군 5년(1613) 당시 현감인 이오(李 )가 대성전을 중건하면서 연차적으로 여러 건물을 재건하였고 이후 여러 차례 중수를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본 향교는 풍화루, 동∙서재, 명륜당, 상재, 직사재, 대성전, 내삼문, 제기고, 홍살문, 하마비 등이 있는데 일반적 향교 배치 방법인 교당부와 문묘부의 전후관계에 의한 축배치가 아니고 대성전의 문묘부를 명륜당 좌측에 두고 좌우배치의 경사지 건축인데 다만 명륜당과 외삼문의 기능도 갖고 있는풍화루는 동∙서재의 중앙을 지나는 남동향의 축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 외건물의 배치를 보면 동∙서재 외에도 명륜당 좌측에 상재가 있는 것은 타향교에서 볼 수 없는 특징이며 풍화루 앞에는 하마비와 홍살문이 있으며명륜당 좌측에는 수령 520여 년 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건물의 건축형식을 보면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1칸, 전후퇴의 1고주반9량가로 자연석 덤벙 주춧돌 위에 민흘림이 있는 원형기둥을 세웠다. 공포는 주심도리 밑에 공안이 없는 두공첨차가 있고 외목도리의 밑에는 행공첨차를 익공 상부에 소루(小累)를 놓아 받치고 있는 주심포계의 외 1축목2익공양식이다. 도리와 장혀를 받치고 있는 초공이 닭머리로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며 툇간의 내부는 운공형의 보아지로 퇴량을 받치고 있다. 지붕은겹처마로 맞배지붕이며 바람막이판이 있다.
동재는 정면 4칸, 측면 1칸, 전퇴 5량가의 무익공식 건물로 우측 툇간은돌아가는 난간으로 되어 있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에 바람막이판이 있다.서재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3량가의 맞배지붕인데 출입문의 방향이동제와 마주보지 않고 직사재(덕성재)쪽으로 나있다. 풍화루는 정면 3칸,측면 2칸의 2층 루형식의 건물로 초익공양식이며 계자난간으로 되어 있다.
(7) 광양 송천사지 회은장로비(光陽松川寺址悔隱長老碑)

회은장로의 행적은 비문에 의하면 그의 선대는 남원에 거주하였고 그의 속성은 기씨이며 자는 응준, 호는 회은이라 하였다. 어려서출가하여 옥지노사가 머리를 깍아주어 승려 생활을 시작하였으며 인조 14년(1636) 청나라 군사가 우리나라에 침입하였을 때 전라순찰사 이시방이관군을 동원하자 이에 호응하여 벽암대사가 승병을 일으키자 회은은 참모로 활약하였다. 조정에서는 그의 공을 높이 사서 절충과 양호도총섭을 제수하였고 인조 25년(1647)에는 지렵지공으로 가선대부와 팔도도총섭을 받았다. 현종 원년(1660)에 자헌에 가자되고 승병대장이 되었으며 현종 4년(1663)에 정헌으로 특별히 가자를 받아 군무에 재임하였다.
이 비는 음기에 의하면 순찰사 박신규와 당시의 광양 현감 안시익(숙종 3년, 1667년 8~11월 재임), 그리고 송천사가 협동으로 건립하였음을 알 수있다. 비의 건립연대는 말미에「皇明崇禎丙子後四十二年丁巳月日」이라 한것으로 보아 숙종 3년(1677)임을 알 수 있다. 음기는 비 건립에 참여한 순찰사와 광양현감 외에도 본사질∙각수∙도편수∙연화질∙도감∙삼강 등의 명록이 있다.
전액은 회은장로비명, 비명은「有明朝鮮國全羅道光陽白雲山松川寺址故正憲大夫八道都摠攝兼僧兵大將悔隱長老碑銘」이다. 비는 이수와 비신 그리고 좌대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수의 전면에는 쌍용이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고 후면에도 용을 비롯하여 게, 개구리, 자라 등이 새겨져 있다. 비신의 비문은 대체로 판독이 가능한 양질의 돌을 사용하였다. 다만 비신 여러 곳에 탄환 자국이 있으며 비의 모서리는 농부들이 낫을 갈아 상당히 훼손되어 있다.
비명을 승려의 법명이 아닌 회은이란 호를 썼던 것은 회은이 승려로서 평가되기보다는 오히려 승병대장으로 더 유명하였던 것에 기인하지 않는가생각된다. 비의 이수에 용을 비롯한 동물들의 조각이 비교적 섬세하게 되어있으며, 승려를 낮게 평가하는 조선시대에 순찰사나 현감이 비의 건립에 앞장선 점도 주목된다.
(8) 광양 궁시장(光陽弓矢匠)

활은 구석기시대 후반부터 인간의 생활수단으로 개발되어 생활을 보호하는 무기가 되었다. 활은 장궁과 단궁으로 나뉘고 구조상 환목궁과 복합궁으로 나뉘는데 우리나라는 복합궁이 많다. 사용처에 따라 전시에 쓰는 정양궁,궁중연사나 반궁대사례∙향음주례 따위에 쓰는 예궁, 수렵에 쓰는 목궁(고)를 비롯하여 철궁∙단궁∙고궁(동개활)∙철태궁∙포궁∙구궁노∙각궁 등이 있다. 화살은 육양전∙편전∙장군전∙목전 등으로 나뉜다.살의 재료는 시누대를 사용하는데『신증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남의전죽산지는 16개 군현 28개 지역에 나고 있어 전국 산지의 반 이상을 차지했다.
공정은 ① 소금물에 쪄서 음지에 말린뒤 ② 중량에 따라 갈라서 ③ 굽은곳을 바로잡고 마디를 더듬어 ④ 싸리나무를 갈라 시위걸이에 맞게 파낸다.⑤ 꿩깃을 등쪽을 긁어 뗀 뒤 ⑥ 대살의 촉부분을 얇게 갉아내고 부레풀칠을 한다. ⑦ 도고리(토리)를 끼우고 화살촉을 끼워 칠을 한다. 공구는 저울∙실톱∙대잡이 톱∙족침∙오늬칼∙깃따는 칼∙촉틀∙촉송곳 등이다.
광양 지방은 예로부터 공예가 성행했으며 패도∙궁시 등이 유명하다. 패도는 중요무형문화재 제60호(박용기)와 무형문화제 제11호(김중익,1987년 작고)가 있다.
기능 보유자 김기는 아버지 윤선(?~1955년)이 경남 남해에서 태어난뒤 여수로 옮겨 궁도장 곁에서 이발업을 해 궁인들이 드나들면서 인연을맺었다. 김기는 1955년부터 이 곳에 드나들던 박상준(인천거주, 1914년생, 무형문화제 제47호 궁시장)에게서 기능을 배운 뒤 마산에서 조명제(?~1980년, 제47호 궁시장, ’78년 지정)에게서 본격적으로 기능을 전수 받은 뒤 경북 예천에서 권영록(1916년생)씨에게도 기능을 익혔다.『대전회통』에 의하면 조선시대 시장은 238명에 달했는데 그 중 23명이전남에 배속되었다.
(9) 광양 김 시식지(光陽김 始殖址)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해의’란 명칭으로 기록되고 있으나 일명「김」이라 부르기도 한다. 46개 고을의 토산품으로 처음기록이 나오는데 전남지방에서는 영광∙장흥∙나주∙영암∙진도∙강진∙해남∙순천∙보성∙고흥∙광양 등 11개 고을에서 이미 해의(海衣)가 생산되었다.오늘날 우리가‘김’이라고 부르는 토박이 말 대신‘해태(海苔)’라고 쓴 최초의 기록은 순조 17년(1817) 강진유배지에서 정약용의『경세유표』에“해태는 감곽 또는 감태라고도 하는데 태(苔)에는 여러 종류가 있어서 그중 자태(紫笞)란 것이 있다. 자태를 속칭 해의(海衣)라고 하고 사투리로 짐(朕)이라 한다”는 기록이다.
1910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조선수산지』에는 광양의 물산으로 쌀∙면화∙철기∙소금∙해태 등 다섯 가지를 들고, 그 중 해태가 가장 중요한물산이며 국내 수위라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광양에서는 해태(海苔)가 성행했다.
‘김’의 시식에 대해서는 완도∙조약도(助藥島)의 김유몽, 완도 고금면용장리 정시원(조선어업조합요람, 1942) 등의 시식설과 광양의 김여익(1606~1660년) 시식설 등이 있다.
김여익(金汝瀷)은 영암 학산면 몽해에서 태어나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종형 김여준 수사를 따라 청주에 이르렀으나, 항복하자 돌아온 뒤 고향을 떠나 장흥 동백동을 거쳐 인조 18년(1640)태인도로 들어가 갈매기와 더불어 살면서 해의를 시식하는 등 명리를 떠나살았다. 이러한 사정은 숙종 40년(1714) 당시 광양현감이었던 허심(1713. 4~1714. 9 재임)이 지었다는 김여익의 묘표에 적혀 있다. 이 묘표는 남아 있지 않으나 김해 김씨 족보에 남아있다.
후손들은‘해태’를‘김’이라 하는 것은 우리 선조 김여익 할아버지가 태인도에서 해의양식법을 창안하였는데 하동장에서는 태인도 김가가 기른것이라는 뜻으로‘김’이라 했다고 한다.
오늘날 태인도에 남아 있는 재래식 해태양식은‘일본홍’이라는 것으로산 대나무나 녹타, 갈대 따위를 모래펄에 꽂는 방식이고 완도의 재래식 해태양식은 왕대를 쪽지어 발을 만든 뒤 좀 깊은 갯펄에 꽂는 염홍방식 등이있다.
(10) 중흥사 석조지장보살반가상(中興寺石造地藏菩薩半跏像)

이 석조반가상은 원래 중흥사 3층 석탑옆에 버려져 있다가1978년 서울로 불법반출되었으나 그 다음해에 원 위치로 다시돌아오는 등 불운을 겪었다. 높이 79㎝의 크지 않은 좌상으로,통례와는 달리 왼쪽발을 가부좌하고 오른발을 내리고 있다. 좌대와 함께 1석으로 조각되었으며 머리에 걸친 길다란 두건이 어깨까지 내려온 것으로 보아 지장보살이라 하겠다. 이마에는 두건을 쓴 1줄의 띠가 선명하며 얼굴은 6~7세기 금동반가상의 인상을 아직까지 나타내고 있다. 어린 얼굴의 티가 아직 가시지 않은 천진스런 모습에 눈은 반쯤 뜨고 약간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코는 약간 손상을 입어 시멘트로 보수하였다. 목은삼도가 보이나 목부분이 균열되어 시멘트로 보수하였기 때문에 그 밑은 보이지 않는다.
옷주름은 보통불상에서 볼 수 있는 법의가 아닌 우리의 전통저고리와 같은 형태이며 더구나 옷고름이 가슴 앞에서 겹쳐 그 끝이 저고리 섶 밑으로내려온 것은 전혀 전례를 따르지 않은 형식이다. 하단부로 내려와서 치맛자락이 아닌 두루마기 같은 형태로 조식되었는데 이러한 불상 옷주름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특이한 것이라 하겠다.
반가상의 경우 대개 오른발을 내리고 왼발을 반가하는 것과는 반대로 왼발을 반가하고 오른발을 내리고 있다. 이는 강진 무위사 극락전에 봉안되어있는 삼존불 중 오른쪽의 지장보살의 형식과 같아 주목된다. 좌대는 사각형으로, 전면과 좌우양측이 아래를 향해 피어 있는 8잎의 연꽃이 조식되고 후면은 연꽃잎이 생략되었다. 중석은 전후좌우에 아무런 무늬가 없고 그 윗편에 위를 향해 피어있는 연꽃이 조각되었는데 양측 좌우에만 홑잎이 새겨져있다. 고려시대는 석조반가상이 거의 없는 실정으로 이러한 중흥사의 예는반가상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하겠으며 재료 또한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화강암이 아니고 그 질이 단단한 점판암이다. 만든 시기는 고려시대로추정된다.
(11) 광양 마로산성(光陽馬老山城

마로산성은 광양읍 용강리 해발 208.9m의 마로산 정상부와 능선을 따라 테를 두르듯 둘러쌓은테뫼식(머리띠식) 산성으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고 있고, 형태는 남-북측이 길쭉한 사각형을 이루고 있다. 이 산성은 백제시대에 돌을 쌓아 만들었으며 통일신라 때까지도 꾸준히 이용되어 왔고 임진왜란 때는 광양읍성회복을 위해 왜군과 치열한 싸움을 한곳이기도 한데 지리적으로 주위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요충지이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550m, 성벽너비 5.5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1-2m, 성내면적 18,945㎡인데 현재 대부분이 허물어져 내린 상태이다.
산성안에서는 백제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다량의 기와류와 토기류를 비롯하여 흙으로 빚은 수통, 석환(전투용 주먹돌)등이 출토되었고,「馬老」,「 官」,「 軍易官」등의 글자가 있는 기와를 발견하였다. 광양의 옛 이름이 마로현으로 이 성은 마로현의 중요 행정관청이 있던 곳이었을 가능성과 행정관청을 방어하던 시설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또한 산성의 남쪽과북쪽 모서리에 망을 볼 수 있는 망루 2곳과 2-3개의 건물지, 성 안팎에서우물지 등이 확인되었다.
(12) 광양 불암산성(光陽佛岩山城)

불암산성은 진상면 비평리 불암산 남서쪽 줄기에 위치한 해발231.5m의 봉우리를 테를 두르듯 둘러쌓은 테뫼식(머리띠식) 산성으로 동∙서축이 긴 사다리꼴 모양을 하고 있다. 백제시대에 만들어진 산성으로 건너편 삼각봉에도 자그마한 산성이 있어 이곳불암산성과 함께 옛날 이 지역 고을로 비정되는 비촌현을 방어했던 곳으로추정되며 임진왜란과 구한말 의병활동에도 활용된 것으로 전해온다. 산성의 규모는 둘레 500m, 성벽너비 5.5m, 외벽높이 3-5m, 내벽높이 1-2m,성내면적 17,955㎡인데 성벽 대부분이 허물어져 내린 상태이다.
성벽 안에서는 백제시대에 사용된 다량의 기와류와 토기류를 비롯하여 어망추와 석환(전투용 주먹돌)등이 출토되었고 또한 성벽의 동북쪽 중간지점과 남쪽 중간지점에 각 1개소의 문지(門址), 성내 서편과 북편에서 건물지, 동편 높은 곳에서는 건물지 또는 망루로 보이는 시설이 확인되었으며, 북서쪽 물웅덩이 부근에 우물 1개소가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불암산성은 이 지역의 고대사외에도 백제의 지방통치 체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자료로 쓰이는 산성이다.
(13) 광양 중흥산성(光陽中興山城)

중흥산성은 옥룡면 운평리에 있는 산성으로 해발 278.2m에서 406.4m에 이르는 6개의 산봉우리를 아우르면서 계곡의 경사면을 최대로 이용하여만든 포곡형(包谷形: 계곡을 둘러싼 주위의 산릉에 따라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성안에 넓은 계곡을 포함하고 있음) 토성(土城)이다.
이곳은 백운산 중턱의 한재를 중심으로 구례∙남원∙하동∙화개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산 전체가 천연적인 요새로 흙을 쌓아 만든 토성인데 단순히 흙을 쌓아 올린 것이 아니고 일정한 두께로 흙을 쌓아 다졌다. 산성의 규모로 외성은 길이가 약 4㎞정도로 매우 길며, 외성 안쪽에 약 240m에 이르는 내성으로 흙을 쌓았다. 성벽너비 9~13.5m, 외벽높이 3.05m, 내벽높이 1~2m, 성내면적 488,823㎡이다. 축성시기는 통일신라말 또는 고려시대 초기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는 의병과 승병의 훈련장으로 활용되었고 왜군의 습격을 받아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으로 전해온다.
중흥사 입구 세심정에 남문, 옥룡면 추산리로 넘어가는 오솔길에 북문터가 남아있으며, 고려시대 기와류 등이 확인되었다. 광양시에서 조사된 산성가운데 유일한 토성으로 만든 시대도 고려시대로 추정하고 있어 보존가치가 높은 산성이다.
(14) 광양 무등암 목조대세지 보살좌상(光陽無等庵木造大勢至菩薩坐像)

광양시 다압면 신원리에 소재한 무등암(無等庵)은 경남 하동쌍계사의 말사로 1959년에 건립된 근래의 사찰로서 다압에서하동으로 건너는 섬진교 못 미쳐서 불암산의 동북쪽 경사면에위치하고 있다.
전남 지방에서는 대세지보살좌상에서 처음으로 복장물(발원물, 진신사리 보치 진언문, 후령통 등)이 발견되었으며, 보살상의 절대연대∙봉안처∙조성동기∙시주자 등의 중요내용을 알 수 있다. 이발원문에 의한면 보살좌상은 1678년에 만들어졌다는 내용과 아미타여래의 좌우보처로 관세음보살과 함께 삼존불을 이루고 있었으나 본존불과 관음상은 없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봉안처는 지리산 소은난야(小隱蘭若)라 기록되었는데 문헌에 나오지 않아 소재지를 파악할 수 없다. 다만 지금 무등암 주지인 은사스님이 쌍계사에서 오랫동안 활동하면서 이 보살상을 가져온 것이라 전하므로 소재지가 쌍계사의 암자일 가능성이 크다.
보살상은 조선 후기의 양식이나 법의에서 반단(半袒)형식이 없고 군의(裙衣)의 상단이 띠 매듭없는 일자형이며 상현자를 이루고 있는 특징이 있으며 규모는 총고 62㎝이다. 이러한 형식의 보살상은 전남지방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드문 예로 중요한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