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 작품소개

진월(津月)면 역사/유래

  • 관리자 (appkorea108)
  • 2018-01-31 23: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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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양(光陽)시 역사/유래

백제시대에는 남방(南方)의 헐평군(歇平郡)에 소속되어 마로현(馬老縣)으로 불렸으며, 통일신라시대 경덕왕(景德王) 16년(757) 이후부터 고려 초기까지 행정구역상 무주(武州) 승평군(昇平郡)소속 희양현(曦陽縣)으로 개칭 되었다가 고려 태조 23년(940) 다시 광양현(光陽縣)으로 칭하게 됨

고종 32년(1895) 5월 26일에 칙령 제 98호로 23부제 실시에 따라 남원부(南原府) 광양군(光陽郡)이 되었으며, 1914년 돌산군 태인면이 골약면에 편입되었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거 골약면 송장리가 여천군 율촌면으로 변경되었음

1966년 1월 1일 광양군 조례 제374호에 의거 골약면 태인출장소를 개설하여 골약면 태인리와 금호리를 관할하였고, 1983년 1월 10일 대통령령 제11027호로 골약면 태인출장소가 태금면으로 승격되었음
1986년 1월 1일 전라남도 조례 제1554호에 의거 골약면, 태금면, 옥곡면 광영리를 관할하는 전라남도 광양지구출장소가 개설되었으며,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 27009호에 의거 옥곡면 광영리가 골약면 관할로 변경되었고, 여천시 묘도동 지진도가 태금면으로 편입됨.

1989년 1월 1일 법률 제4050호에 의거 전라남도 광양지구출장소 관할지역이 동광양시로 승격되었음
1995년 1월 1일 법률 제4801호에 의거 동광양시와 광양군 통합하여 광양시 출범

 

진월(津月)면 역사/유래

진월면 지역에서는 지금까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유적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선소리 이정과 오사리 돈탁마을에 조개더미(패총) 등이 분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선사시대에 이 고장에 사람이 살았을 것으로 추측된다.

원래 광양군의 지역으로서 1914년에 진하면과 월포면을 병합하여 진월면이라 하였다. 진하면은 현재 진상면 청암리와 금리리 사이에 있는 나루터를 경계로 그 아래쪽이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인데, 광양에서 하동으로 가는 관행길의 아래쪽이 된다고 하여 하도면이라고도 불렸다. 월포면은 지금의 중도가 제방이 생기기 전에는 마치 섬진강 가운데 또 있는 것 같이 보였는데 달밝은 밤이면 섬 주위의 물위에 달빛이 어려 섬이 달속에 잠긴 것 같이 보이므로 월중도 또는 월등도라 하였는데 여기에서 '월(月)'자를 따고 포기의 '포(浦)'를 따서 월포면이라 한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수어천 지역에는 차의포가 있었고 중도지역에는 거을망포가 있었는데 1914년 이들이 각각 진하면, 월포면에 속하게 되었다.

  동쪽은 섬진강 건너 경상남도 하동군 고전면, 서쪽은 옥곡면과 진상면, 남쪽은 골약면의 동남쪽인 광양만, 북쪽은 다압면에 접하고 있다. 구하도평과 신도평은 1973년의 경지정리사업에 의하여 전천우답이 되었다

금동(琴洞)마을 역사/유래


약 300년 전에 이천 서씨가 처음으로 정착하였다 한다. 총 40호중 32호가 이천 서씨이다.
금동마을은 '걸망개', '거을망포'로도 불린다. 마을 앞에 개(浦)가 있는데 이가 바로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나는 거을망포이다. 금동 남쪽에는 왼고개로 가는 편에 몰(말)처럼 생긴 '몰고개'가 있는데 금동마을은 이 말 안장의 '걸개'를 한자로 '巨乙亡浦'로 표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 이 '걸망개' 혹은 '거울망포'가 왜 금동으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다. 일설에는 300년전 거문고를 잘타던 이 마을 이천 서씨의 거문고 가락에서 '琴'자를 따왔다고도 한다.
금동마을에는 '장군바구'가 둘 있는데 하나에는 장군의 오줌자국이 남아 있고 다른 하나에는 장군의 나막신 자국이 남아 있다. 또 장군바구의 아래에는 장군바구에 대해 공손한 읍례를 하는 형상의 '읍례바구'가 서 있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금동마을에는 오래된 물방아가 주욱 있었으나 현재에는 일부의 돌만 남아 있다. 마을에는 또 노거수로 350년 정도 된 정자나무가 있는데 수종은 귀목이다. 금동 서쪽에는 이천 서씨의 재각인 운양각이 있는데 약 200년 전에 세워진 것이라 한다. 금동마을 남쪽에는 1962년에 설립된 송금제(몽리면적 12.3ha, 만수면적 0.2ha)가 있다

신송(新松)마을 역사/유래

금동 동쪽의 마을로 구송리에 비해 새로 되었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새터'로도 불린다. 김해 김씨에 의해 200년 전에 생겼으며 현재도 김해 김씨 8호가 거주한다. 송현과의 사이에 구한말 월포면사무소터가 남아있다. 월포면은 1914년 진하면에 합병되었다.

 송현(松峴)마을-(구송마을) 역사/유래

솔고개 밑에 있는 마을로 신송보다 오래된 구송이다. 솔고개(松峴)는 송현 북쪽에서 월길리의 대리로 가는 고개로 솔이 많다하여 솔고개인데 이것이 그대로 마을의 이름으로 수였다 한다. 혹은 송현이라는 이름은 조선조에 이곳에 있었던 성현소가 변하여 된 것이라고 보는이도 있다.
450년 전에 김해 김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으며 현재는 이천 서씨 12호, 김해 김씨 9호 기타 19호가 분포한다.

 

 

대리(大里)마을 역사/유래


문바구 남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월포마을 이었으나 중간에 대리로 개칭되었다. 약 400년전에 김해 허씨가 이곳에 정착하였다. 현재는 김해 허씨 18호, 이천 서씨 16호, 김해 김씨 15호, 곡부 공씨 8호의 순으로 분포되어있다. 월포는 마을 앞에 개(浦)가 있어 붙여졌던 이름으로 후에 마을이 크다는 뜻의 대리로 개칭되었다. 대리가 마을이 크다는 의미가 아니라 대나무에서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이 마을의 대나무는 질이 좋기로 유명하여 궁중에 진상되었다는 것, 죽사라는 절도 있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대(竹)촌의 '대'가 음 그대로 사용되어 대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죽사(竹寺)는 국사봉에 있는 비구니 절이었는데 도둑이 자주 들어 자주 옮겨 다니던 끝에 절이 아주 없어졌다 한다. 대리 북쪽에는 당산나무가 있어 해마다 정월 보름날에 당산제를 지낸다. 이 마을의 서편에는 1938년 축조된 '月吉提'가 있다. 마을 앞에는 2기의 비가 서 있다. <徐又巡女史善德碑>는 어려운 이웃을 돕고, 다리를 놓고 학교부지를 기부하는 등의 선행을 한 공을 기려 1964년 향민들이 세운 것이다. <崔正浩面長頌德碑>는 1972년 향민들이 청렴으로 선정을 펴고 도로개설에 공이 있는 최정호를 기린 비이다. <昌原 黃公鳳旭頌德碑>는 단독으로 '월송노인정'을 건립한 공을 기린 것이다.
 

중도(中島)마을 역사/유래

월포 동북쪽에 있는 마을로 원래는 섬진강 가운데 있었으나 지금은 육지로 이어졌다. 전에는 월중도라 불렸는데 이는 섬 주위의 경관이 아름다워 보름달이 강물에 비칠 때면 섬이 마치 달속에 있는 것처럼 보여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뒤에 '月'자를 떼고 중도라 하였다. 지금으로부터 약 200년 전에 성주 도씨에 의해 마을이 이루어졌다 한다. 현재의 성씨 분포는 진양 하씨 18호, 김해 김씨 14호, 성주 도씨 6호, 기타 34호이다. 마을 입구에 <金大葉女史功積碑>가 있다. 덕으로서 가난한 이웃을 도운 공을 기려 1972년 향민들이 세운 것이다.

가길(加吉)마을 역사/유래

매팃재 남쪽에 있는 마을로 '갈기리', '갈거리'로도 불린다. 약 300년 전에 원주 이씨가 처음 이곳에 정착하였다. 현재는 총 57호중 김해 김씨 15호, 원주 이씨 12호, 장흥 고씨 4호, 기타 20호가 분포되어 있다. 마을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상고할 수 없다.
가길마을에서는 매년 정월 보름에 당산나무에 당산제를 지내고 있는데 당산제를 지내는 날은 초저녁부터 새벽녘까지 개 짓는 소리도 나서는 안된다는 점, 제주는 얼굴을 보이지 않게 하려고 삿갓을 쓰고 당산나무까지 간다는 점 등에 특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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